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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문예 공모전

[장려상 - 미니 자서전]양필숙

인생이모작

82세이신 어머닌 8년 전부터 파킨슨병으로 조금씩 몸이 불편해지면서 힘들어하셨고 지금은 혼자서는 바깥 외출을 할 수 없는 힘든 상태가 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거동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정신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과거의 힘들었던 삶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면서 힘들어하십니다. 그러나 아픈 몸으로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정신이 조금 괜찮아지면 운동을 하면서 강한 의지로 삶을 지탱하고 계십니다. 한 번씩 강하게 고집을 피우시는 아이 같은 어머니를 보면서 맘이 아프고 슬퍼집니다.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아들만 이뻐한다고 화를 내고 고집 피울 때 나를 보고 어머니가 그랬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내 마음을 달래 봅니다. 그렇게 80세에 어린아이가 돼 버린 어머니 오늘도 그런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리고 목욕도 시켜드립니다. 어머닌 늘 행주도 파란빛이 날 정도로 삶아 씻었고, 여름이면 모시를 정갈하게 입고 수영장을 다니셔서 수영장 지인들이 모두 감탄하고 놀라워하시는 정갈하신 어머니셨습니다.

그 정갈하셨던 어머닌 그 성격이 남아 있으셔서 목욕을 못 하시면 답답해하셔서 주말이면 목욕을 해 드립니다. 목욕 후에 로션을 싫어하시는 어머니께 피부가 건조해서 안 바르면 안 된다고 로션을 발라 드렸습니다. 그런 우리 모녀를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시는 90세의 아버지의 눈빛에서 오랜 연민의 정과 애잔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발 마사지해 드릴까요?’ 하고 여쭈어보면 근엄하셨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아버지 발을 마사지해드리면서 군인 시절 얻게 된 동상으로 굳은살이 박인 아버지의 발을 보면서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고단한 삶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흔적들을 보면서 내 마음에 있었던 지난날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발을 씻겨 드리면서 마음의 응어리들도 씻어냅니다.

언젠가 고모에게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진 어린 시절 재주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마을에 행사가 있는 날이면 실로 가발을 만들어 머리를 땋고 색동저고리를 입고 여장을 하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하모니카를 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기억해 보면 2대 독자이셨던 아버지는 그 시절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어서 아버지도 주위 사람도 모두 아들을 원했을 겁니다. 그런 시절에 3녀 1남 셋째딸로 태어난 저는 태어난 시기부터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 딸이란 소리를 들으시고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또 딸이냐며 화를 내셨고 속상한 어머닌 저를 낳고 나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랫목에 밀쳐지면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뒤로 태어난 남동생은 3대 독자로 부모님의 사랑을 다 받으면 자랐습니다. 건강식이든 좋은 것은 아들을 주고 남동생 물심부름을 하면서 그것이 싫었지만, 아버지가 엄격하면서도 무서우셨기 때문에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잉어 즙 등 먹기 싫어하는 음식도 먹지 않으면 혼을 내셨고 저녁이면 술을 드시고 오셔서 화를 자주 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건강을 생각하신 아버님만의 방식이었는데 그때의 아버지 맘을 이해하기엔 저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술이 취하신 아버지가 던진 밥상에 놀라서 기절했던 적도 있어서 아버지란 단어는 저에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공포와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버진 그 시절에도 책을 읽으라며 많은 책을 사주셨고 동물을 좋아해서 강아지와 물고기 새 등을 키우시며 어린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했던 다정한 부분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런 다정한 마음보다는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상처 그런 마음은 커서 어른들을 보면 두려워하고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자상한 남편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무슨 일이든지 어머니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혼자 모든 일을 결정하셨던 거로 어린 시절을 기억합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타지 이동이 많았고 타지를 이동하면서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보필하면서 어렵게 우리 4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치고 힘들게 되면서 아버지는 제가 6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군대를 제대하게 되셨습니다. 그렇게 제대를 하면서 우리 가족은 충청도를 떠나서 부산 남포동에 이사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아버지는 친척분의 소개로 직장을 다니게 되었고 노점을 하려던 어머니의 사정을 아시고 친척분의 도움으로 아버지 직장에 옥상에 살림집을 마련하여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어머니께서는 회사에 직원들을 상대로 사내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직원들의 점심을 챙기는 식당 생활을 하면서 힘드신 어머니께서는 늘 부지런하고 성실하면서 유머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법당에서 지내시던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해지자 할머니가 계시던 법당에서 지낼 수 없게 되었고 어머닌 아버지가 계모라고 싫어하는 할머니를 우리가 안 모시면 어떻게 하시냐면서 자식 된 도리로 모셔야 한다며 모시고 오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까지 모시게 되었습니다.

식당을 하면서 낮에는 식당일로 밤에는 낮과 밤이 바뀌신 할머니를 돌보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린 나이에 내가 봐도 엄마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엄마처럼은 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철없던 저는 엄마를 도와 드려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얼른 결혼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행복한 가정을 가져야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과 아픈 할머니 엄격하신 아버지, 자상하고 사랑이 많으시지만, 본인의 삶에 지친 어머니를 보면서 방황하던 시절 직장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혼자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남편은 무엇보다 저를 많이 사랑하고 좋아해 주었고 제 이야기를 무엇이든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라면 나의 미래는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했던 남편은 결혼하면서 장사를 해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성공을 꿈꾸던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남편은 비디오를 빌려주면서 비디오 가게를 하자고 하였고 잘 할 수 있다는 남편의 말을 굳게 믿으며 비디오 가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디오 가게는 생각보다 장사가 되지 않았고 믿고 빌려준 테이프는 자주 반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같이 가게에 있던 우리는 늘 다투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따로 방을 얻지 못하고 비디오 가겟집 위에 살림을 살았던 우리의 생활은 힘들었고 돌이 안된 아들은 낮에는 유모차에 밤에는 다락에서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삶이 힘들어서 이렇게 살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고 남편은 대기업의 세일즈맨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가지면서 세일즈맨의 특성상 남편은 바깥일만 더 신경 쓰고 가정은 소홀히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즐기기 바빴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비디오 가게를 그만두고도 속옷 가게 등의 자영업을 하면서 홀로된 아프신 시아버지와 아이를 돌봐야 했습니다.

지병이 있으신 시아버님이 병원 갈 일이 많아지면서 친정어머니께서는 병드신 아버님을 모셔야 한다고 하셨고 불편한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댁이 있는 울산으로 이사하여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 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도 남편은 성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해서 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기를 반복하고 자기 장사를 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장사를 하고 실패를 하는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런 남편과 힘든 생활을 하면서 나는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나라도 반듯한 직장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취업처에 지원해 보았지만, 경력이 없다는 이유와 IMF 사태로 힘든 시기라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실망할 무렵에 00 유업에 면접 후 어렵게 합격하여 근무하게 된 첫 근무지인 00 유업에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근무하였습니다.

2000년도에 아프셨던 시아버님은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시고 마을에서 마지막 꽃상여를 타고 이승에서 고단한 생을 마감하시고 소풍 오셨던 길을 떠나 시어머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편은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고 나는 00 유업의 비정규직에서 다시 00 유업 아웃소싱회사 세 곳의 업체를 이동하면서 18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던 저는 2015년 울산지점의 시장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부산지점과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남권 행사사원들의 교육 담당으로 매장에 찾아가서 제품 교육을 하는 교육팀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다른 타지를 옮기면서 업무를 진행하고 업무가 바뀌면서 직장에 대한 불안과 나이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48세 내가 잘하는 것이 무얼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 18년 동안 받았던 교육 속에서 깨달음과 교육을 통해서 변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을 통하여 변화한 나는 소심하고 말이 없던 성격에서 활발하고 먼저 다가가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받으면서 늘 듣던 이야기는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서 100세까지 살 게 되고 그 이상도 살게 되어 100세 시대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100세 이상을 살 게 되고 내가 50세가 되면 내 인생을 새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무렵 인생 이모작이란 이야기와 은퇴 후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나도 인생 이모작 제 2의 인생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2의 인생에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축제 같은 나날과 꽃길만 걷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육받는 동안 변하고 좋았던 만큼 공부를 더 해서 강의를 하거나 학생들 지도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상대하던 직업을 가졌던 나는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편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나 또한 그런 직업이 나에게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도 그런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과 학습을 병행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아보다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알게 되었고 청소년 과에 입학하여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한국방송대학교에 다니는 4년 동안 대학의 슬로건처럼 나에게도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내 인생을 바꾼 대학’이 되었습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재학 중에는 학교 관련 총학에 업무도 하고 학과에서 사무국장을 하면서 나의 시야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학과 모임과 봉사활동에서 통해서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었고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면서 제 자존감도 높아졌습니다. 청소년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직장생활만 하면서 돌보지 않았던 아이들에 대해 반성도 하게 되고 세대에 따라 변화는 청소년들의 꿈과 진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봉사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여 행동으로 옮기면서 50세 이후에는 봉사하며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복지관에서 배식, 자원봉사 교육, 환경 등의 봉사를 하면서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삶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고 나도 내 인생의 2번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는 교육팀장을 하다가 제2팀 발령을 받았고 매일 대구까지 출근하여 문경, 안동, 영주까지 다니는 생활이 지속하였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정리해고라는 단어로 근무하던 직원들은 모두 해고되면서 저도 퇴직을 해야 했습니다. 퇴직한 동료들이 다들 무엇을 하지 고민하는 사이 나는 그동안 시간 나는 대로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진로지도사, 웃음치료사, 레이크레이션 강사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교육과 실전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런 경험들은 나에게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자격증을 기초로 전혀 새로운 분야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 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퇴직하고 그 전에 준비한 공부와 자격증을 바탕으로 도전한 직업 그 첫 번째가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의 안부와 안전을 지원하는 일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홀로 살고 계시는 많은 어르신을 만나면서 그 어르신들께 삶에 대한 지혜를 배워 가면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아버님을 모셨던 나의 경험과 어르신들ㅇ게 더 가까이에서 봉사하면서 내 중년의 삼의 가치도 높이는 일이었고 이 사회의 우리 모두가 함께여서 서로에게 행복과 사랑에너지가 넘치는 것을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거노인생활관리사는 기간이 정해진 일이라 다른 업무에 도전하여서 일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청소년학을 공부하면서 청소년 모니터 요원으로도 활동하였고 청소년들이 상호소통하는 장이 단순한 체험이 아닌 스스로 계획하고 꾸민 무대가 되고 건전하고 건강한 성장이 돼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어서 청소년 관련 일을 공부했으니 청소년 관련 일을 하고 싶던 차에 직업상담사란 직종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련 취업처를 찾던 중에 울산미용예술고등학교에서 취업지원관을 모집하는 것을 알게 되어 지원하였고 2019년부터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인생 이모작을 꿈꾸면서 막연히 해왔던 공부들이 꿈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의 삶과 인생을 바꾸어 주었고 2021년 지금은 내가 꿈꿔왔던 대로 학생들을 지도하며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태어난 걸 환영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늘 나를 자존감 없이 소심하게 만들었지만, 교육을 통해서 나를 찾고 자존감을 높였으며 그런 일들이 부모님을 이해하고 부모님께 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방황하던 남편도 지금은 열심히 가정을 지킨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친정 부모님께 늘 여행 시켜드리고 찾아가 뵙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머니께서도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여행도 자주 못 다녔을 거란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고 아버지 또한 고맙단 이야기를 하시며 눈물 흘리셨습니다.

귀가 어두우셔서 소리를 듣지 못해서 포크레인에 치여 다리를 다친 후로 다리가 불편하고 기운이 많이 없어지신 아버지의 어깨에서 무거웠던 삶을 느낍니다. 아버지가 시장을 가고 싶어 하셔서 모시고 시장에 갔더니 할머니들께서 “아버진가 보네 사이가 좋아 보기 좋다”는 말씀과 “아버지가 젊었을 때 잘 생기셨겠네”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시장에서 볼 수 있는 호구 조사라 생각하고 푼수처럼 “아버지가 잘생기셔서 어머니 속 많이 상하셨어요” 하고 이야기 드렸더니 그 시절 어르신들은 말 안 해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그래도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하는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정신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못해본 걸 하시겠다고 소리도 지르시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지친 우리 4남매는 잠깐이라도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려고 의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모시기로 한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병원에 보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속 깊은 마음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아버지의 다리가 불편함 걸 알고 먼저 손 내밀어 손잡아 드리고 90세의 고단했을 아버지의 삶도 이해하는 54세의 딸은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인생 이모작 취업지원관으로서 60세 정년까지 근무하면서 상담학을 더 공부하여 이제 남은 인생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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