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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삶의 고백
부끄러움을 부끄럽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내려놓으려 한다.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더는 서러워지고 싶지 않는 버리고 싶은 아픈 흔적들의 흩어진 조각들을 기억해가며 초라한 나의 삶을 고백한다.
더디지만 아름답게 피고 싶은 꽃
62세 나이로 2015p년 고입 검정고시로, 인생 이모작을 시작했다. 남겨진 것이라고는 초등학교졸업장과 잔고 없는 통장이 나의 전 재산 이였다. 돌아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죽음과 삶을 넘나들며 살아온 기구한 운명이었다.
우리 가족은 일본에서 해방직후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홍역으로 5남매를 잃어버렸고 어머니는 자식을 잃어버린 고통과 가슴앓이의 병든 몸으로 나를 품으셨다. 아들이기를 바라며, 아들이어야 한다는 그 기대를 배반하고 딸로 태어난 나를 어머니는 내가 자식임을 거부했다. 어머니는 막 태어난 어린 아이를 이불 속에 묻고, 일주일동안 젖을 물리지 않았다고 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 어머니는 내게 사실을 고백하는 눈물을 흘리며 죄 많은 어미를 용서해 다오. “여자로 태어나 불행한 어미팔자를 닮게 될까봐서, 차라리, 그건 삶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니까, 하시는, 어머니의 고백에 하늘도 나도 울음을 삼켰다. 죽은 자의 호적으로 살지 않으면 5살을 넘기지 못한다는 시주 온 여승의 예언으로, 5살 때 죽을 고비를 넘긴 나는 한참 유효기간이 지난 언니의 호적으로 살아야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꿈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가져온 돈과 청과물조합 경매인으로 계셨든 아버지 덕분에 띠 동갑인 언니와 우리4식구는 작은 행복을 나누는 단란한 가정 이였다. 하지만 언니는, 이름 모를 병으로 2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6명의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그 일로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우셨고, 어머니는 화병으로 몸져누우셨으며,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전신마비로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눈을 감으셨다. 13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으시고 하얀 눈꽃이 소복이 쌓이는 저녁, 먼저 보낸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셨다.
어머니와 나는 집을 팔아 병원비로 남긴 채무로 정리하고 리어카에 짐을 실고 산동네 단칸방으로 짐을 옮겼다. 그리고 나의소망을 담은 책가방과 패션디자이너라는 꿈을 가슴에 묻어두고, 그곳에서 철거민들이 이주한 곳으로 터를 배당받아 어머니와 나는 음식과 밑반찬을 만들어 생필품과 부식을 팔았다. 산 동내 겨울바람은 어린나이에 김치를 담그는 손은 고추 독으로 손등은 터지고 갈라져 피가 맺혔지만,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어머니의 후덕한 인심과 나의 부지런함으로 우리는 다시 작은 금고에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한 푼 한 푼을 소중하게 아끼고 모았다. 그렇게 우리는 산동네 단칸방에서 벗어나 땅을 사고, 상가를 지어 가게를 넓혔다. 넘쳐나는 금고를 바라보며 희망과 행복 속에 살았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행복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성냥팔이 소녀의 따뜻한 성냥이 꺼져버린 것처럼, 나의 희망도 한 순간에 무너졌다.
너무 아파, 아픈 줄도 몰랐던 세월
35년을 법원을 들락 그리며, 목숨을 담보로 자유를 선택했었던 댓 가로 얻어진 나의 해방, 결혼이란 잘못된 선택으로, 나는 어머니와 나를 지켜줄 상대를 원했고 상대는 나를 원하는 조건부의 결혼은 파탄을 예고했었던 것이었다. 폭력. 주벽. 낭비벽, 의처증 세상에 존재하는 나쁜 버릇은 다가진 그는 술만 취하면 악마로 돌변하는, 그 다음날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순한 양으로 변하는 두 얼굴의 괴물 이였다, 그의 이중성의 공포를 견딜 수 없어 이혼을 요구할 때 마다, 집에다 불을 지르고 온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전쟁터를 만드는 그 난폭함에 치를 떨며 내 영혼은 서서히 불이 꺼지고 소리 없이 시들어 갔다, 세상과 30년을 단절 해버렸고, 그의 그림자만 보면 길길이 뛰고 장롱 속으로 숨고 했던 내 정신 세게는 황폐해져 우울증으로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
두 얼굴의 그와의 목숨을 담보로 했었던 35년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댓 가로 보상받는 자유였다. 하지만 그 보상의 댓 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맨주먹으로 다시 세상을 마주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다는 걸 실감하는 한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리는 내게는 다른 방법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선 남겨진 패물을 팔아 월세의 작은방과 가정용 재봉틀을 구입해서, 아파트 단지에 전단지를 붙이고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배운 바느질솜씨로 옷 수선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검정고시 학원의 문을 밀쳤다. 학원의 문을 밀치는 순간 눈앞이 앗질 했다. 몇 십 년 동안 사람들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는 “난 손발이 떨리고 이름을 제대로 못 쓰는 나를 본 담당직원이 대필을 해주며 혹시 몸이 불편 한 거냐고? 물어왔다. 난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면 질식할 것 같고 첨보는 사람 앞에 서면 손이 떨려서 이름자도 잘 못 쓴다. 그 공포를 격어 온 세월의 흔적이 아직도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나는 그의 얼굴만 보아도 몸이 경직되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작은 발소리 하나에 놀라 소리를 지르고 장롱 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검붉은 불덩이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환각 속에 길길이 날뛰며 도망을 다녔다. 지옥이었다. 제발 목숨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매일 하늘을 향해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공포증(특정한 물건, 환경, 또는 상황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불안장애의 일종)과 신경증(내적인 심리적 갈등이 있거나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다루는 과정에서 무리가 생겨 심리적 긴장이나 증상이 일어나는 인격 변화)이라고 했다.
2015. 4. 12 내 평생 잊지 못할 일
시험장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공포감이 몰려와 온몸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잘못 작성한 답안지수정을 거치면서 불안해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수학 시간에는 답안지만 4번을 바꾸는 실수로 시험장 안에 온통 눈들은 나를 주시하고. 난 울음을 터뜨렸고. 감독관님들은 이번 에는 포기하시고 내년에 다시 도전하라는 위로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년이라고 달라질 것도 아닌 고질병에 눈물을 훔치며 4시간을 종료로 책가방을 챙기는데, 그때 점심시간에 학원에서 4시간의 답안지를 돌리고 있었다. 나도 받아 점수나 알고 나가자 싶어서 체크를 하는데. 놀라워 입을 다물지 못 했다. 80점을 남겨놓은 합격 점이였다. 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환호성을 지르고. 불안이가시니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 했다. 내가 언제 그러했냐는 듯이 고요함으로 정제되어 시험지가 똑바로 보였다. 두 과목을 치룬 합격점은 100점을 넘기며. 검정고시 내가 꿈꾸는 세계로 나가는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생각이 운명을 바꾼다
나의 2모작은 맨발로 자존감 하나로 세상과 마주했다. 작은 공간의 책상위에 가정용 재봉틀을 올리고 남은 공간으로 책상과 밥상으로 사용하면서 겨우 한사람의 누울 공간에 옷가지 몇 개와 이불이 전부인 가구에, 나의 재2의 삶을 시작했다. 남들이 자는 시간에는 책을 펴고 남들이 쉬는 시간에는 재봉틀을 돌리며, 지하철 오가는 등굣길에는 영어단어를 외우고, 시간을 쪼개어 나를 채찍질 하는 시간들이였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점심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 점심 값을 아끼려고 김밥과 컵 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연습장은 전단지 이면으로 묶어 사용하고. 미장원은 가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너무 길면 집에서 가위로 자른다. 목욕제품은 비누하나로 화장품은 아주 저렴한 기초상품으로 구입하고 옷은 길표 재고품을 리폼해서 입고, 철저한 시간 관리와 절략과 절제로 문화생활은 꿈도 못 꾸는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그렇게 아끼고 절약한 작은 돈으로 1년에 4번 설,추석 어버이날, 크리스마스에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경로당 어르신들을 찾아 외로움을 함께한다. 내 삶에 존재를 학인 한다. 하지만 맨발로 세상과 마주하면서도 단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한적 없다.
대학에 도전장을 내다
학교마다 전화를 돌리며 선택 한 학교가 부산 동주대학 패션디자인 과였다. 이유는 ? 전문대라. 생활비와 등록금 문제로 2년 만에 졸업한다는 장점과 2년 후에 형편이 좋아지면 편입할 생각으로 당장 아쉬운 생계로 이어오는 옷 수선의 질의 도움이 되는 또한 디자인의 공부를 위해 패션 쪽으로 시작하자는 생각 이였다.
나의 대학생활은 피나는 노력의 결실 이였다
만학도 지원이 아닌 수시1차 지원의 1등 올 시작해. 졸업 내 내 젊은 청년들을 젖치고 등록금 한 푼도 내지 않는 성적 장학금으로 4.5 만점으로 졸업석상 단상에서 총장님의 성적우수상 특별상을 가슴에 안았다.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성적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공부를 중단해야 할 것 같은 절박감으로 내 선택에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그리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 해보인 셈이다.
<2017년> 부산패션디자이너공모전에 출품한 나의 작품: 여심은 잠재하고 있는 불타는 여인의 마음을 표출한 작품이었다. 육 개월에 걸 처 탄생한 이아이가 700점이 넘는 작품에 40등의 예선을 거처 15명의 본선 진출에 대학신입생은 꿈도 못 꾸는 그 자리에 브랜드 상으로 백스코 무대에 모델이 내 옷을 입고 걸어 나오는 광경은 하나의 불꽃을 연상케 했든 무대가 불타오르는 것 같은 그 순간에 <작가 정지우> 모댈 아무개 무대로 나오라는 호명에 감격으로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다들 교수님들마저 예상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학교가 생긴 이래 유례없는 영광을 학교에 안겼다. 이 작품 여심이 모교, 2018년 신입생모집 광고용 팸플릿으로 제작되어 사용 되었다.
육 개월에 거처 탄생한 <여심 >이 작품은 모시를 핀 탁 바느질로 부채를 만들어 조각을 내어 불꽃을 만들고. 바구니 기법으로 천을 엮어 불꽃을 담는 항아리로 표현했다. 항아리를 엮는 과정에서 작품이 완성 되는가 하면 흘러내려 원위치로 수 십 번을 반복하는 사이 출품 날짜는 닦아오고 작품은 완성되지 않아 말은 안 해도 모두가 1학년이 겁도 없이 가능성 없는 일에 도전을 해서 난감하게 만든다는 질타와 걱정하는 눈치였다. 다급한 마음에 일주일을 학교에서 야간에는 학교작업실에서 재단하다 남은 천조가리로 이불삼아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낮에는 수업을 하고 씻는 것은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컵 면과 김밥으로 식사를 해결한 가슴으로 잉태한 작품 이였다. 가을의 산속의 작업실은 추위와 오싹함으로 긴장 한 가운데 팔다리가 분해된 마네킹들이 바람소리와 함께 바닥에 팔다리도 떨어지는 날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밤을 보낸 작품이다. 단임 교수님께서도 가끔은 재단하는 바닥에 쭈그리고 누워 잠을 청하며, 같이 밤을 보내면서 지우 씨 너무 많이 만져 걸레패션이 되었네요. 하며 배꼽을 잡고 웃던 기억과 잠이 덜 캔 눈으로 새벽차를 몰아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잠을 쫒기 위해 가을여인을 합장하던 그때의 기억이 소중한 추억이 되어 늘 내게 머문다.
나의 도전 길은 멈추지 않는다
동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에 국어국문학과에 도전해서 졸업반이다. 글을 쓰보고 싶은 욕심에서 마음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세상에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나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내년에 대학원에 진학 할 준비를 한다. 가게가 없는 나의 잠자리에서 시작한 옷 수선은 이제는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우리옷의 맞춤집주문제작의 “지우”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하는 실정이라 많은 일을 못하지만. 옛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금 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다자인 제단 바느질까지 직접 하는 일인 다역을 한다. 요즈음 같은 불경기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많은 옷을 만들기엔 협소한 장소와 경제적 여권이 허락지 않아 날개를 달기에 아직은 역부족이다. 하지만 옷에 나의 혼을 담아낸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내 삶을 설계하듯 최선을 다하는, 고객의 눈높이에 선 이미지 옷을 만들어 낸다. 양장에 아름다운 우리옷의 선을 접목한 우리고유의 옷을 언젠가는 날개를 달아 지구저쪽 남쪽까지 날아갈 꿈을 꾼다. 그리고 세상에 쏟아내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을 배우는 중이다. 부족 했던 나의 자아를 가꾸고 다듬는 작업이다. 내게 누가 묻는다. 그 나이에 박사를 꿈꾸느냐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도 꿈을 향해 도전 하고 있다. 하지만 박사보다는 밥 사를 더 좋아 한다. 지금도 그날 누구엔가 밥을 사면 참 행복하다 내가 누구에게 줄 수 있다는 그 작은 여유 작은 행복이 내가 살아 있다는 존재의미를 말한다.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책을 펴는 나의 이모작은 계속 되지만. 내가 여유로워 지는 만큼 많은 밥을 더 많이 사고 배고픈 이에게 배부르게 먹이고 싶다. 그 따뜻함을 많이 베풀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있는 존재의 이유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기도로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