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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꿈은 이루어진다
1. 지붕이 날아갔다
52세였던 남편은 25년 전 급성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한지 보름 만에 두 아들과 철물가게를 남기고 나와함께 가게를 운영한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상시에는 건강하였는데 갑자기 어지럽다고 하였다. 어지러운 것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 줄은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나는 가게 때문에 갈 수가 없어서 목사님과 함께 서울S병원으로 진찰을 하러 갔다. 그날로 입원을 하고 말았다. 병명은 ‘급성백혈병’이라고 하였다. 미련한 마음에 최고의 병원에 입원만 하면 어떤 병이라도 거뜬히 치료가 되는 줄로만 알았다.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돈이 문제지 의술이 문제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결과는 백혈구를 이식해야 한다며 형제 중에 백혈구를 이식할 수 있는 형제를 알리라고 하였다. 이식을 하려면 먼저 검사를 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때가 추석명절 전이었기에 바로 이식을 할 수가 없고 추석명절을 지나고 해야 한다며 빠른 준비가 필요했다. 4남2녀의 육남매가 있었지만, 어느 형제도 선뜻 나서지를 않았다. 누구는 남편이 반대하고 누구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안 된다며 아무도 검사에 응하지 않았다. 남편이 건강할 때는 집안의 대소사를 척척 알아서 처리하였는데 정작 생명의 뒤안길에서 허우적거리자 나서는 형제는 없었다.
다행인 것은 거래처 직원이 그 말을 듣고 자신이 해주겠다며 제일먼저 검사에 응해주었다. 백혈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것을 나누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도 몰랐다. 형제도 아닌 남인데도 백혈구를 나누겠다는 거래처 직원의 배려가 낙심된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명절이 코앞인지라 검사만 해놓고 추석명절을 지내고 이식을 한다며 혹시, 하다가 안 될 수도 있으니 한 사람은 예비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 마저도 나서주지를 않았다. 나라도 검사에 응하려고 하였지만 혈액의 문제이기에 나는 할 수가 없었다. 큰 아들이 나섰다. 그러나 아들의 혈액이A형이었다. 나누어야할 대상은 형제들 밖에는 없었다.
온몸이 떨리고 발걸음이 제대로 걸어지지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심장은 방망이로 빨래를 두들기는 것처럼 두들겼다. 어느 한 형제라도 하겠다고 나서 주었으면 내 심장이 이렇게도 방망이질을 하지 않을 텐데, 무심한 형제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이렇게도 형제들에게 나쁘게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우리가 잘못하지 않고 아주 잘하고 살았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정작에 생명 앞에서 모르는 척 하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는 식으로 외면하였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감사한 일이었다. 남은 부분은 내가 믿는 하나님께 맡기자며 추석명절을 기다렸다. 그러나 운명이 거기까지였는지 추석을 지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백혈구를 이식하지 못하고 갑자기 호흡이 빨라져 중환자실로 옮기는 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의 일처럼 덤덤했다. 서러워서 우는 것도 정신이 있을 때 울 수가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내 일이 아니었다.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어제까지도 멀쩡한 지붕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다. 형제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래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하자 모두가 올라와 주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영정사진이 있는 곳에 꽃 한 송이도 놓지 않고 손님을 맞았다. 영구차에 올라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화장을 하지 않고 고향 선산으로 가서야 남편의 죽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남편이 묻힐 고향집에는 허리가 굽고 귀도 눈도 어두운 팔순의 어머니가 살아계셨다.
팔순의 어머니는 추석명절에 살아온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죽어서 고향땅에 묻히러온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을 먼저 보내시고 고향집을 간신히 지키고 계시는 어머님께 가슴에 구들장 같은 무거운 짐을 안겨드리는 그날, 나는 죄인중의 상 죄인이 되고 말았다. 상상도 못할 일이 마을 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머님은 마을 앞에 도착한 영구차를 가로막고 대성통곡을 하셨다.
“내 아들이 왜 이 명절에 살아서 오지 않고 죽어서 내 집에 오느냐, 내 아들이 죽어갈 때 어미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죽은 자도 살리는 의술 좋은 지금 세상에 왜 살리지 못했느냐?” 소나무껍질처럼 말라버린 손바닥으로 길바닥을 치며 통곡하시는 어머님의 울부짖음에 도둑질 하다 틀 킨 사람처럼 정신없이 떨었다. 통곡하고 울어야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울어야할 사람은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마음으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다. 변명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님 말씀처럼 살아서 추석명절에 고향을 찾아와야 하는데 죽어서 묻히려 가는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님의 비통함을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모두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추석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었는데, 서러움의 보따리를 안겨드린 불효막심한 며느리였다. 엊그제까지 살아 있어서 장사하면서 전화하면 퇴원해서 꼭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어나는 과수원 길을 걷게 해 주겠다며 허허하며 웃던 사람을 땅 속에 묻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울음은 한이 되어 절절이 온 산천에 울려 퍼졌다. 그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영구차에 올랐다.
가을의 소슬 바람은 얼음장보다도 더욱더 시리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저녁이 되면 큰 아들 이름을 부르며 오는 것처럼 발자국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환청에 몸부림을 쳤다.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려면 쉴 수도 없었다. 음식 씹을 힘도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씹어 삼켜야 했다. 가장의 자리와 무게는 상상할 수도 없이 무겁고 위험했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온 집안이 무너질 위기였다.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했다. 평안하게 울고만 있으라고 가만 두지를 않았다. 그래서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산 사람은 다들 잘 산다고 하는 것이리라.
2. 휴지가 된 2억의 부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했던가. 남편을 고향땅에 묻고 흙에 물기도 마르지 않았는데, 나라에 금융위기라는 IMF가 스나미처럼 밀려왔다. 장사하면서 받은 2억의 어음이 휴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혼이 반쯤나간 사람처럼 온 미음이 무너져 내렸다. 부도가 대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내 숨통을 조여 왔다. 그렇지 않아도 제정신이 아닌 혼돈 상태인 나를 천지 분간을 가르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또한 텔레비전을 켜기만 하면 연일 자살 뉴스로 도배를 할 정도로 곳곳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내 귀를 웅성거리게 하였다. 실컷 울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울 수 없었다. 우는 것도 사치였다. 울 시간도 없었다. 엄마가 가장으로 이름이 바뀌는 순간에 양 어깨에는 수천 톤이 되는 가장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2억의 어음이 날마다 휴지가 되었다.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거액의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명주실처럼 질기게 붙잡고 살아온 복숭아꽃 살구꽃을 피우는 과수원의 꿈도 동화작가나 소설가가 되는 꿈도 희망도 사라졌다.
꿈의 동아줄이 썩은 새끼줄이 되고 말았다. 날마다 어음을 막으려고 새벽별을 보고 나가서 오밤중에 일을 마쳤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그냥 죽고 싶었다. 밤에 자면서 정말로 내일의 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죽으려고 수면제를 한두 알은 죽지 않을 것 같아서 다섯 알을 모았었다. 날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내 한 목숨이 아니고 두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외면 할 수가 없었다. 오늘만, 오늘만, 하며 지내오다가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힘이 없었다. 엄청나게 고갈된 현실은 나를 죽음으로까지 이루게 할 것만 같았다. 한방이면 갈 수 있는 방법만이 내게는 최선이었다. 상상도 안 되는 2억의 현찰이 얼마나 곰삭아야 해결이 될 줄도 모르는 일이었다. 날마다 돌아오는 어음이 내 턱 밑에서 숨을 제대로 실 수 없도록 버티고 서서 한발자국도 비켜가지 않고 허기진 정신을 슬프게 할 뿐이었다.
그 충격으로 지병인 갑상선 항진증이 제발하여 더욱더 내 숨통을 조여 왔다. 새벽에 나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지만 장사를 마치고 올 때면 가슴이 쏟아지는 것처럼 아파서 앉아서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야했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망가지고 말았다.
때는 이때였다.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한방에 가는 길,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마음이 편안했다.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망가지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죽으려고 이 날은 어음을 교환하지 않고 교환할 돈과 통장에 있는 것까지 몽땅 현찰로 찾아왔다. 통장 비밀번호도 적어두었다. 가게를 정리 정돈을 해놓고 대학을 다니는 큰 아들에게 군대에 있는 동생 잘 부탁한다는 유서를 써 놓고 나와서 가게 셔터 문을 내리는 순간, 양 어깨에 짊어진 수천 톤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제대로 흘려보지 못한 눈물이 소리 내어 울어보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버스를 타고 오는데 꼭 죄인처럼 느껴졌다. 차창밖에 스쳐가는 마을들을 내다보니 집집마다 전기불이 다른 때보다 더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이 유난히 밝게 빛이나 보였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저 집에 불은 누가 켰을까? 엄마가 켰을 것이다.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해 놓고 남편과 자식들을 기다리겠지.’ 라는 생각이 미치자 죽으려고만 생각하고 ‘엄마’라는 내 자신을 잊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될 줄로 알았는데, 갑자기 내 심장이 늑골을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마지막을 택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강을 건너려면 물결과 함께 건너라’고 했듯이 내가 죽는 것 보다는 2억의 빚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두 아들에게도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것이 힘이 들면 가게를 팔고 파출부 생활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파출부를 해서는 두 아들의 교육을 시킬 수는 없었다. 행여, 두 아들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하면 아버지의 부재로 배우지 못했노라고 내 평생 두고두고 원망 아닌 원망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이고이 몇 겹으로 금가락지를 싼 것처럼 싸서 가지고 다녔던 수면제를 꺼내서 차창 밖으로 내 던져버렸다.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면 언제라도 위험의 순간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두 아들의 ‘어머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채우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이었지만 천국이 아닌 지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집에 오니 큰 아들이 유별나게 나를 반겼다. 아들의 얼굴을 대하자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져야할 짐을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는 어리석은 엄마는 되지 말아야했다.
3.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없다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없을 것이다. 수학에 문제가 있으면 정답은 분명하게 있는 법이다. 시련이 있다면 해결의 길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고통의 삶이 내가 싫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복이 있다고 한들 부와 행복만이 위한 삶이겠는가!
행복은 곧 고난을 이겨낸 자에게만이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내일까지 생각하지 말자. 그냥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 있는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살자. 오늘 주어진 고난이든 행복이든 내가 견디어 내야하고 누려야 하는 내 삶의 몫이기에 싫다고 벗어나려 하지 말고 밟고 나가자. 그것만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이라고 하여서 내가 선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과부가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닌 숙명인 것이기에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 자신을 달래도 여전히 가슴은 뛰고 손발은 떨렸다. 남편을 땅에 묻을 때 누군가가 제법 큰 소리로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사는 사람은 다 잘사네요.” 하였던 소리가 귓가에서 웅성거렸다. ‘그래,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사는 사람은 기가 막히게 잘 산다는 것을 꼭 보여 주고 싶었다. 이 세상에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없을 것이니까.
그러나 ‘호랑이 굴속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말이 실감나는 생활이었다. 이때부터 새벽을 깨워야 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움직여야 살 수 있었다. 새벽기도를 마치면 바로 가게로 향했다. 2억의 빚쟁이가 잘 잠을 다 잘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목숨을 걸었다. 묘했다. 목숨을 내 놓으니까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내가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생각은 헛되지 않았다. 건설현장에 일하러간 사람들이 우리 가게에 가면 새벽에 문을 연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 들었다. 다행히도 그 주변의 가게들이 새벽에 문을 여는 곳이 없었다. 장갑이 제일 많이 팔렸다. 날마다 장갑이 탑 차로 들어와서 가게 앞에 산처럼 쌓아 놓고 팔았다. 공구는 나도 잘 몰랐지만 공구로 물건을 채우려면 돈이 너무 많이 필요했기에 돈이 조금 들면서 부피가 많은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공구는 샘플만 가져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구해주었다. 동네에서 사다주면 이익이 없었다.
그러나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손님들은 냉정할 때는 냉정했다. 약속을 잘 지키다가 한번만 다음으로 미루면 다시 오지 않는다. 하나를 이익이 없이 준비해서 주면 다른 물건들을 팔아 주었고 그 손님들의 입소문은 무서웠다. 영업을 하지 않고 단골손님을 만드는 것은 철저하게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게에만 오면 없는 것 없이 다 있다는 소문이 나자 너도나도 와서 물건을 주문하고 사갔다.
새벽에만 파는 것이 하루 매출 될 정도로 새벽장사가 2억의 부도를 정리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거금 삼천만원의 전세금을 보증하고 얻은 돈으로 열 평의 가게를 보증금 이천 만원에 월세45만원이었다. 천만 원으로 공구철물의 물건을 진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처음에는 부피가 많은 장갑을 위주로 하였지만 주변에 가게들은 장갑은 기본이고 이름 모를 공구와 철물들을 가게 안에 가득했다. 이름을 모르니 물건을 납품해주는 중간업자에게 무슨 물건이라고 주문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시간만 나면 주변 가게를 다녔다. 가게에 가서 제일 많이 쌓여 있는 물건을 무조건 판매 가격에 사와서 내 가게에 진열을 했다. 많이 쌓여있는 물건은 많이 팔리기에 쌓아두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내 생각이 절충했다. 사다가 진열해 놓으면 그 다음날에는 이유 없이 팔렸다. 물론 이익이 없었다. 장사는 내가 다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장사는 손님이 하는 것이었다. 다른 가게에서 사온 물건을 팔고나면 때로는 이름도 모를 때가 있었다. 공책에 사온 물건의 이름을 가격까지 적어두었다가 중간업자에게 주문을 하는 식으로 빈 가게를 채워나갔다. 또한 날마다 공책을 보며 이름을 외웠다. 그렇게 채우는데 이웃가게에서 제안을 해왔다. 자기네가 물건을 도매 값으로 주겠으니 물건을 다른 곳에서 받지 말고 팔아 주라고 하였다. 서울에서 형님이 공구철물을 도매 한다고 하였다. 물건 값도 한 달 팔아서 주라고 하였다. 손해 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물건을 받아서 팔았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건을 이웃가게에서 받아서 파니 그 가게보다 물건을 조금도 싸게 팔 수 가없었다.
한 거래처라도 먼저 차지하려고, 아무리 자기네 물건을 많이 팔아 주어도 알게 모르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이좋게 지내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은연중에 손님들에게 우리 가게 물건은 자기네가 납품해주기에 자기네 보다 싸게 팔 수 가없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난감할 때도 있었다. 자기네는 나보다 싸게 팔면서도 내가 조금만 싸게 팔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시로 반박을 하였다. 세상 참 무서웠다. 경쟁사회라는 것을 실감했다. 남편의 부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어쩔 수없이 서울에서 오는 중간업자와 거래를 하기에 이르렀다. 마음이 편했다. 내 맘대로 손님들에게 싸게 팔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공부한 것이었다.
그 후로는 물건이 없으면 주문을 해서 주었지 이웃 가게에서 사다가는 팔지를 않았다. 어려울 때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거래처들이 어음에서 현금으로 결재방법을 변경해 주기도 하였고, 공장에서 필요한 자재를 우리에게 밀어 주기도 하였다. 가장 가까이서 도움을 주셨던 분은 목사님의 도움이 컸다. 2억의 부도를 정리하기 위해서 전셋집을 빼야했다.
갈 때가 없었다. 목사님이 사용할 서재 실을 내 놓았다. 배달이 문제였다. 목사님이 나섰다. 오전에는 교회 일을, 오후에는 가게에 오셔서 주문 받아놓은 물건들을 공장마다 다니며 납품을 해 주셨다. 성도의 어려움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와준 목사님은 참으로 부지런 하셨다. 언제까지 그럴 수가 없었다. 25세의 젊은 직원을 채용하게 되었다. 내 형편을 아는 손님들이 도움에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이런 일을 하려면 어려움이 많겠다며 물건 주문을 하고 돈을 먼저 계산을 해주고 가게에 없는 물건은 주문해서 가져와도 된다며 납품할 여유를 주면서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3년 만에 2억의 부도를 정리했다. 욕심이 생겼다. 시내에서 보다는 가게 세도 싸고 그곳은 100여 평이 넘는 창고들이 많았다. 소기업이 공단을 이루고 있는 변두리로 겁도 없이 도, 소매를 하려고 100평의 창고를 얻어서 확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4. 캄캄한 터널이 있다는 것은?
어려울수록 인재를 채용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발전이 없다. 돈을 벌려면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고 인재를 채용하는데 망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장사가 잘되어서 지역을 넓혔으면 인재를 채용했어야 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물론 인재를 채용하려면 문제는 돈이 연결이 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값을 한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고 생각이다. 사람을 잘 채용하면 아무리 돈에 날개가 달려서 날아간다고 하여도 잡을 수가 있다.
나는 사람을 채용하는데 인색하여서 사업에 실패한 것이다. 내가 못하면 나를 능가한 인재를 채용해야 사업이 번창할 수가 있다. 직원이 든든하면 주변에서 무시를 못한다. 남편의 빈자리를 직원이라도 든든한 사람으로 세워야했다.
2년여 동안은 계획한 대로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었다. 이만 하면 되겠다며 한숨을 돌리는 찰나에 변이 생기고 말았다. 매의 눈은 항상 먹이에 꽂혀 있듯이 남의 눈에 띄게 가게가 잘 되어도 먹잇감이 된다. 장사가 잘 되다 보니 내가 과부라는 것을 잊었었다. 매는 과부가 저렇게 장사를 잘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나?’ 하면서 우리의 단점을 노린 것이었다. 어느 날 공문 한통이 왔다. ‘창고에서는 장사를 할 수가 없으니 원상복구를 하든지 벌금을 내든지 글린 시설로 변경을 하든지 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원상복구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차라리 벌금을 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전화를 했다. 벌금을 내야 한다면 얼마나 내야 하는지를 물었더니 벌금은 그때 가봐야 아는 것이고 민원이기 때문에 일단은 원상복구를 하라는 어명이었다. 난감했다. 남편의 부재가 여실히 들어나는 순간이었다. 내 앞에 빙산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깨 부셔도 부서지질 않고 내 머리꼭대기에서 누군가가 꾹, 밟고 있는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우리를 신고한 사람은 장사가 잘되니 우리를 완전히 몰아내고 자기가 들어와 독점을 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의심만 갈 뿐 물증이 없었다.
나는 원상복구를 하여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내 건물이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원상복구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이 돈을 들여서 시설변경을 해주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주인이 못하겠다고 하면 나는 보따리를 싸야만 했다. 시설 변경은 돈이 많이 들어야 했다. 창고 안에 화장실이 있어야 하고 그 화장실을 시설하려면 정화조가 필요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게 되면 상수도가 들어와야 했다. 돈이 한두 푼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속만 태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든 일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밝은 대낮에는 그래도 견딜만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내려진 가게 문을 보면서 또다시 이 가게 문을 열 수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났다.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울음보가 터지면 한 시간도 좋았다. 장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하루해를 보낸다는 자체가 혼돈의 하루였다.
일은 그럴 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억대의 부도를 정리할 때는 장사라도 잘 되었다. 장사하는 재미라도 있으니 견딜 수 있었다. 지출은 정해져 있는데, 가게 문을 닫아놓고 가게 문을 언제 열어야 한다는 기약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것은 내안에 있는 피가 다 말라버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버틴다고 하더라도 부도 위기에도 장사가 잘되어서 큰 아들을 미국유학을 보낸 상태라 정답은 없었다. 나는 돈을 벌어서 빌딩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두 아들의 교육만 잘 시키면 된다는 생각으로 2억의 부도를 정리 하면서도 공부하고 싶다는 큰 아들에게 공부는 다음에 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부도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지 공부를 다음으로 미루는 바보는 되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어 빌딩을 사면 좋겠지만 돈보다는 배움을 택했다. 빌딩은 지킬 수가 없을 수도 있지만 머리에 담아놓은 학문은 언제라도 사용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자식에게 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아니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그 길을 택했다. 둘째는 군대에 가 있었기에 큰 아들만이라도 남과 같이 사는 것 보다는 남 이상 살게 하고 싶었다. 욕심이었을까? 공부에 대한 것은 나도 미련이 많았다. 공부를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어머니로서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돈은 필요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또한 성경말씀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도 하였다. 2억의 부도를 당하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재산가라도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캥거루 엄마는 되고 싶지 않으려고 두 아들의 배움은 자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아버지의 부재를 표를 내지 않고 끝까지 해 주려고 노력했다.
배는 무게 중심인 균형감각을 지키지 못하면 침몰하고 만다. 희망을 건져 올리는 순항의 배를 뒤집히지 않도록 힘껏 노를 저어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없고 ‘어머니’란 이름으로 강하게 살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때때로 박복한 나의 인생에 대해서 회한을 느끼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에 지아비를 잃고 과부가 되는 것도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라는 생각에 하늘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피눈물 나는 나날이었다.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가게 문을 내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남편 없이 두 아들을 가르치고 형제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면 내게 주어진 장사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파출부 생활을 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했다. 혹시라도 주인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염려도 몰려왔다. 설령, 안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주인 바지를 잡고서라도 사정을 해야 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건물 주인에게 알렸다. 천만 다행으로 주인은 내가 속으로 끙끙 앓고 염려하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건물시설변경을 두 말할 것도 없이 많은 돈을 들여서 일사천리로 해주었다.
가게 문을 내리고 원상복구를 감행했다. 장사는 하지 못해도 거래처에 필요한 물건은 납품할 수가 있었다. 직원은 아침이면 거래처를 돌면서 필요한 물품을 주문을 받아서 납품을 해주면서 가게에 오는 손님은 단골손님이면 문을 열어주고 모르는 사람이면 수리중이라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원상복구가 건물시설변경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진열해 놓은 물건을 모두 치우고 빈자리와 물건을 담아놓은 박스까지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과 함께 올려야 된다고 하였다. 100평의 넓은 공간에 하나하나 펼쳐놓은 물건들을 박스에 주워 담아야했다. 펼쳐놓을 때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것을 주워 담으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몹시 아팠다. 내 힘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
펼쳐진 물건들을 내손으로 박스에 담을 용기도 힘도 없었다. 교회청년들의 도움으로 원상복구를 하였다. 100평에서 50평으로 축소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 공구철물의 가지 수가 그렇게 많은 줄을 장사하면서도 몰랐다. 원상복구를 하면서야 알게 되었다. 하나하나가 다 돈이었다. 물건을 박스에 담는 것이 아니고 돈을 담는다는 생각으로 손톱이 달토록 원상복구를 하였다. 6개월 만에 가게 문을 다시 열게 되었다. 캄캄한 터널을 지나온 것이다.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장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했다.
캄캄한 터널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벽이라도 무너뜨릴 과부의 오기가 발동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5. 문제를 쪼개고 쪼개라
문제를 쪼개고 쪼개라. 혼신의 힘을 다해 캄캄한 터널을 빠져 나왔다. 긴 호흡의 숨이 필요했다. 이제는 정리할 것은 정리를 해야 했다. 가장 염려되었던 어음거래처를 정리하고자 직원에게 더 이상 거래를 할 수가 없겠다고 하였다.
“괜찮아요, 부인이 경리로 있으니까요 부도가 나도 3개월 전에는 알게 돼요 염려마세요. 그만 하더라도 그때 그만하면 됩니다. 문제없어요.”
안심을 시켰다. 직원의 부인이 경리로 있는데, 부도가 나게 되면 제일 먼저 알게 될 것이고, 부도가 난다고 하더라도 우리 것만은 해결해 주겠지 ‘설마’ 하면서 퍼주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을 잡고 말았다. 가게 원상복구를 하고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초겨울이었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직원이 일찍 나왔다. 예감이 이상했다. 이럴 때 머리가 하늘로 솟구친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로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는 느낌이었다. 날씨 때문인지는 몰라도 순간 몸이 떨렸다.
“오늘 최 과장이 일찍이 나왔네, 어디 갈 일이 있는가?”
“죄송합니다. 와이프 회사가 부도났어요.”
“......” 할 말이 전혀 없었다.
얼음이 얼어 있는 빙판에 절구통을 내 던지는 것처럼 내 심장에 찢어지는 아픔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아픈 가슴에서 천불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서 천불이 나서 입안이 다 타버렸기 때문에 한마디의 말이 입 밖으로 튕겨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미치겠다. 죽겠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살만할 때 하는 말이다. 심장이 멎을 정도의 상황이 되면 말을 할 수가 없다. 금액이 1억이었다. 사람 모습도 보기가 싫어서 밖으로 나와서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이 파란 하늘인줄 알았는데, 그날 하늘은 유난히도 노랗게 보였다. 장사 ‘장’자도 모르던 나에게 장사를 하면서 배운 교육비 치고는 터무니없는 거금이었다.
나는 오너가 될 그릇이 못 되었다. 날마다 어음거래처를 정리해야 한다고는 하면서도 1년을 정리하지 못하고 한 여름 엿가락 늘어지게 질질 끌고 온 내 잘못이었다. 한 달에 1억을 넘는 매출전표를 발행 하면서도 어음하나를 정리하지 못한 것은 욕심 때문이었다. 천치바보였다. 2억의 어음도 부족하여 1억의 어음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현금과 바꾸는 일은 녹록하지가 않았다. 가게 문을 내릴 수는 없었다. 어찌하든지 큰 아들의 유학은 마쳐야 했다. 당장에 아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데, 돌린 어음은 돌아오고 있었다.
비싼 이자지만 어음을 회수하기 위해서 일수를 얻어서 막았다. 6개월의 공백으로 이미 바닥이 난 재정 상태는 허리를 휘게 하였다. 그것도 모자랐다. 카드깡이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카드깡을 하게 되었다. 카드깡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카드와 주민등록증을 킥 서비스로 보내주면 물건을 카드로 사고 카드와 주민등록증과 6백만 원어치의 물건을 샀다는 명세표까지 돌아왔다. 내가 받은 돈은 4백2십 만원이었다.
나는 어려워도 미국에 있는 아들은 살아야 했기에 돈은 가지고 있으면 날개가 있어서 움켜쥐면 쥘수록 날아가기에 바빴다. 생각할 여지도 없이 카드깡 한 돈을 몽땅 써도 모자랐지만 2백은 아들에게 보냈다. 이럴 때는 자갈이 돈이라고 하면 손톱이 닳아 피가 나더라도 어머니의 이름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팠을 것이다. 카드깡은 다른 것과는 달랐다. 그 다음날 바로 카드회사에서 전화가가 왔다.
H카드회사라고 하면서 카드사용한 내용을 물었다. 카드깡 하는 곳에서 시키는 대로만 말을 하라고 해서 그대로 말을 하였다. 형사가 심문을 하는 것 이상으로 교묘하게 이리저리 물어 보는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자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내일 당장 회사로 나와서 사용처를 알리라고 하였
다.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해서 벌을 받게 하겠다는 전화였다. 단숨에 내 인생이 여기에서 끝일 것만 같았다. 직원은 친절했다. 찾아가는 방법을 버스에서부터 전철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알려준 대로 찾아갔다. 경찰서에서 심문 받은 기분이었다. 두 아들의 이름을 묻고 직장까지 물었다. 솔직하게 말을 하였다. 큰 아들은 미국에 있고 작은 아들은 군대에 가 있으니 이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다는 약정서를 쓰고 카드를 압수당하고 그 돈까지 물어야 했다. 다행히 혼자라는 것을 봐서라도 돈을 일시불로 내야 하지만 분할로 갚으라며 선처해 주었다. 아들들의 직장을 물어오니 오금이 저려왔다.
사무실에서 내려오는데 어떻게 해서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걷지 못한 사람처럼 웅크리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집에를 올 수가 있었다.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냥 그대로 두 다리 쭉 펴고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로에서 우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울 수가 있었다. 울 용기가 없었다. 우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 했다. 직원이 그토록 원망 될 수가 없었다. 살아가면서 사람 잘 만나는 복도 있어야 했다. 이것을 인복이라고 했다. 내 복이 없으면 인복이라도 있어야 그 인복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복마저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직원도 남편이 없는 것을 은연중에 악용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돈의 기갈은 사람을 망가지게 하기에 두서가 없었다. 내 자신이 처절하게 망가지고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하여도 뾰쪽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조건 망가지고만 싶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모란역 주변이 네온 싸인 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내 눈을 부시게 했다. ‘에랴! 세상 나도 모르겠다. 술도 한잔 마셔보고 노래도 실컷 불러보고 처절하게 한번 부서져보자!’ 일차로 지하 노래방으로 갔다. 주인은 호들갑스럽게 나를 맞이했다. 이런 곳에 들어와 보기는 남편과 몇 번 와보고는 혼자는 처음이었다. 혼자라 당황스러웠다.
“손님 혼자세요?”
“혼자입니다.”
어렵다고는 하지만 오락은 누구에게나 살아갈 활력소가 되는지 만원이었다. 방마다 손님이 있어서 빈방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여자 한 분이시니 남자 손님과 합석을 해서 즐기다가 가시면 어떨까요. 비용은 받지 않께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몹시 불쾌했지만 부서지려고 그런 곳에 간 내 자신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부서지는 것도 내 마음대로 부서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말 하지 않고 노래방을 나와서 택시를 탔다. 걸어오면 내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기에 단번에 집으로 향했다. 마음이 허전 할 때는 피자를 먹었다. 피자를 먹고 나면 포만감에 그저 부러울 것이 없었다. 죽으려고 하다가도 아들과 피자한판을 먹고 신명나게 살아보자고 하였던 것처럼, 이 날도 피자 한판으로 내 자신을 위로하며 다독였다. 1억의 어음을 현금으로 바꿀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이력이 있어서 덤덤히 살아야 했다. ‘설마! 부인이 해결하겠지!p’
새벽을 깨우기가 싫었다.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날이 밝아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큰 아들을 생각하니 이대로 죽을 수도 부서질 수도 망가질 수는 없었다. 지붕은 이미 날아갔지만 대들보까지 흔들리면 주춧돌인들 온전하겠나!. 기둥뿌리, 석가래, 까지 삐걱거리게 되면 먼저 간 남편이 편히 잠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내 모습 이대로 살다보면 좋은 날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광주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른 새벽이지만 주변이 요란했다. 봉고차들이 줄을 서서 자신들의 일터로 일꾼들을 싣고 가면서 서로가 사람 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인력시장과도 같았다. 젊은 일꾼들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굽어진 허리에 가방을 짊어진 모습은 자신의 인생의 산을 짊어진 것처럼 보였다. 꼭 어린 아기를 업고 있는 것처럼. 하루 몇 만원의 일당을 벌어야 먹고 살 수가 있기에 서로가 앞으로 가 서서 호명을 부르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일할 곳은 주변에 있는 하우스 농장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다. 이천 여주까지도 간다. 하루일당 오만원에서 8만원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가면 참도 주고 점심도 준다고 하였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봉고차에 오르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그 새벽에 나와서 봉고차를 타지 못하면 하루는 공치는 것이기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차례에서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으려고 악을 쓰는 모습은 총칼만 들지 않았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봉고차 주인이 오늘 열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간다. 힘이 없어 밀려나기라도 하면 ‘오늘 벌어야 우리아들 학원비를 하는데......!’ 하면서 울먹였다. 하우스 농사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상추 따는 일은 허리를 펼 시간이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일을 하루라도 쉬게 되면 자식의 학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가는데 선택되지 못했음을 억울해 하는 모습과 아우성은 나에게도 도전이 되었다.
인력시장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광주 가는 버스에 올랐다. 잠시라도 전쟁터에서 살아 나온 기분이었다. 하루 오 만원을 벌기 위해서 이 새벽에 자신의 하루를 봉고차에 맡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그 사람들 보다는 날마다 일거리를 찾지 않아도 되는 내 일터가 있으니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빚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내 몫이다.라고 생각하니 그토록 요동치던 심장의 박동이 수그러졌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울창하던 숲의 나무가 없어지고 민둥산이었다. 덤프트럭과 땅을 파고 고르는 포크 레인 기계들이 산을 허물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그래! 문제를 덩어리로만 보지 말고 쪼개고 쪼개 보자. 울창한 숲도 베어내고 높았던 산도 허물어서 평지로 만들어 건물을 짓듯이 문제 덩어리도 문제로만 보지 말고 깨부수면 먼지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그렇게 문제를 덩어리 그대로 품고 살려고 하였을까?.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문제를 부수기 시작했다. 문제를 쪼갠다고 단번에 먼지가 되어 훌훌 날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가장 하기 쉬운 것부터 쪼개야 한다. 돈을 큰돈부터 갚으려고 하면 줄줄이 사탕으로 걸려들어서 이것도 저것도 할 수가 없게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가장 적은 것을 시작하여 정리하다 보면 한걸음이 빨라진다. 그 걸음에 힘을 실어서 두 발자국을 뛸 수 있다. 지푸라기 하나하나가 모여서 제비집을 짓는 것처럼 적은 것부터 정리하게 되면 아무리 문제가 태산이라도 평지가 된다.
석공이 돌을 조각조각 쪼아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작은 것부터 쪼개고 다듬으면 예쁜 작품이 남게 된다. 그것이 내가 담당할 문제인 것이다. 물론 아주 큰 것부터 정리할 수가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지만 큰 것을 해결하다 보면 적은 것이 더 괴롭히게 할 수가 있다. 1억의 부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숲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시내에서 하던 가게를 넘길 때 권리금을 받아서 그것으로 32평의 아파트를 어렵게 샀던 아파트를 정리해야 했다. 가게 안에다 나 혼자 기거할 공간만을 만들어 짐을 옮기고 생존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파트 대출금 갚을 돈으로 다른 돈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아파도 대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이름으로 된 재산 목록은 내 것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시설변경을 할 때에 가게 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방을 만들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게 안에 방이 있으니 좋았다.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다.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의 기도생활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기에 내 앞에 먹이가 풍족하면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 돈이 있으면 만구강산’이라고 하듯이 내가 그랬다.
신앙생활도 나에게는 악세 사리에 불과했다. 두 번째의 부도는 나의 모든 것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그냥 짜 맞추기였다면 하나하나를 다듬어 가야만 하였다. 하지만 직원의 배신에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를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용서를 할 수가 없었다. 25세에 만나서 결혼하고 예쁜 딸아이를 낳아 초등학생이 되었다. 오후 다섯 시에 일을 마치고 공인 중개사 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내 큰 아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의 가정사나 재정적인 것까지도 의논을 하였다. 나의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적은 금액도 아닌 1억이란 금액을 ‘밤사이 안녕하십니까?’ 란 식으로 부도를 하루아침에 보고를 하는 그 알량한 마음에 몹시 분개가 되었다. 남은 남이었다. 딸이 며느리가 될 수가 없듯이 남이 아들이 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나의 미련함이었다. 주변이 온통 캄캄했다.
6. 신용회복 위원회
도저히 함께 얼굴을 보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불찰로 일어난 일이니만큼 책임을 지고 일 년 동안 월급을 받지 않고 일을 하겠다고 하였지만 직원의 월급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때마침 둘째가 제대를 하여 직원에게는 우리 가게보다 더 좋은 일터를 찾아가라고 아쉽지만 내 보냈다.
문제를 아무리 쪼개고 쪼개도 먼지로 날아가지 않고 그 흔적이 이곳저곳에 상처투성이로 남이 있었다. 세장의 카드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어서 제2금융권까지 대출을 받아서 가까스로 해결을 하였다. 몇 달은 평안했다. 그러나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걸리다 보니 날마다 이자는 이자대로 목을 조였다. 남은 것은 가게였는데, 잘못하다가는 가게도 남아나지를 않을 것 같았다. 제2금융권은 조금만 이자가 밀려도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협박과 함께 밀려왔다. 여차하면 총칼이라도 들고 쫓아올 것만 같아서 불안하고 초조한 하루하루였다. 2억의 부도는 부도도 아니었다. 그런데 죽는 것도 한가할 때 할 수 있는 것이지 정신없이 쫓기다 보니 죽는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아무생각이 없었다. 일단 내 앞에 일어난 일부터 해결을 하여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목사님께 돈을 부탁하였다. 두말없이 이천 만원을 무이자로 돈 벌면 갚으라며 내주셨다.
그 돈은 막혔던 내 숨통을 트이게 하는 거금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은 사모님이 알바해서 모아놓은 비상금이었다. 땀과 눈물과 피로 모아진 거금이었다. 쓰지 말아야할 돈이었지만 금방이라도 갚을 수가 있다는 생각이었고 재2금융권의 협박에서 벗어나고자 이것저것 따지고 할 때가 아니었기에 돈의 출처까지 따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날마다 제 정신이 아닌 혼돈의 나날이었다. 날마다 장사를 해도 돈의 기갈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7월이었다. 공문 한통이 날아왔다.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온 공문이었다. 금융권의 모든 부채를 탕감을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나도 해당이 되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래하는 은행에 가서 문의를 하였더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길로 신청을 하였다. 그것도 될지 안 될지는 기다려봐야 한다고는 하였지만 일단은 접수를 하였다. 날마다 독촉전화로 심장을 쥐어짰는데 생 머리털 한 올 한 올을 뽑아내는 것처 럼 머리를 들 쑤셨던 전화가 끊기니 살 것 같았다. 그때부터 제 정신이 돌아왔다. 식음을 전폐 하다시피 하였는데, 음식이 제대로 씹혔다.
그리고 한 달 후 ‘신용회복 위원회’에서 결정 통보가 왔다. 그중에 신용보증 대출 것만 빼고 모두가 합의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통보였다. 나도 모르게 두 무릎을 꿇고 처음으로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힘껏 쳐다보았다. 암흑의 세상에서 이제야 빛이 비추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도 노랗게만 보이던 하늘이 파란물감을 쏟아 놓은 것처럼 파란 희망의 하늘이었다. 사방이 캄캄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세상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에 감동이었다. ‘신용회복’을 통하여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많은 국민들이 거미줄처럼 얽혀버린 빚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잘못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제도로 말미암아 다시금 살 수 있는 희망의 길로 인도해 준 나라에 큰 빚을 지게 되었지만, 남은 것은 내게 정해진 금액과 유예기간에 잘 갚아내는 것이 보답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욕심을 부리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아주 값진 교훈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7. 마침내 무한변신
나는 문학소녀가 되고 싶었다. 사립문만 나서면 바다가 앞마당처럼 펼쳐진 해남 땅 끝 마을에서 4남2녀의 막내딸로 태어나면서부터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시골이었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에 있는 도자기 공장인 행남자기에 입사하여 직장생활을 하였다. 글쓰기를 좋아한 나는 ‘선데이 서울’ 주간지에 펜팔 난을 보고 전북 임실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한다는 29세의 사람과 드넓은 과수원을 상상하며 2년간 편지만 주고받다가 딱 한 번의 만남으로 24세에 결혼에 골인하였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보니 편지마다 달달한 복숭아를 가득가득 담아 보낸 복숭아 과수원은 흔적도 없는 허허 벌판이었다. 남편은 시골에서 결혼을 하려고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내 몸속에서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물릴 수도 없었다. 때마침 그곳이 섬진강 유역으로 수몰지구가 되어 언니가 있는 서울로 분가를 하게 되었다. 초보인생을 살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남다른 성실함으로 두 아들을 낳아 가장의 자리를 잘 이끌어 주었다.
남편의 부지런함으로 때로는 건설업까지도 하여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언젠가는 거짓말을 현실로 이루어 주겠노라고 두 아들의 교육을 어느 정도 마쳐갈 무렵, 서울에서 시골인 경기광주로 자리를 옮겼다. 이사를 와서 보니 곳곳에 과수원들이 많았다. 석간 신문지국을 하면서 새벽에는 주변의 복숭아 과수원에 가서 일을 해주고 과수원에 대해서도 배웠다. 나쁜 것은 술을 좋아했다. 어느 날 밤중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사고 났다.”
전화는 끊겼다. 누가 잘난 전화를 하는 줄 알고 나도 끊었다. 남편은 그렇게 무모하게 술을 정신없이 마시는 일은 두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보세요? 나사고 났다.” 두 번째 전화였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세요?”
“여기 병원이다.00병원이야!”
전화를 끊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가 전화를 잘못 받은 것만 같았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이 들어오지도 않고 병원이라는 전화를 받고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병원으로 가보니 음주운전으로 인사사고를 낸 것이었다. 그래도 차는 박살이 나서 폐차를 해야 할 정도인데도 사람은 멀쩡했다. 사람이 다치지 않고 살아있으니 감사했다. 음주운전으로 1년간 면허정지를 당하고 있는 것으로 피해자 보상을 하고 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남편 덕분에 순진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나는 사회에는 초년생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철물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남편의 정지된 면허증은 1년이 지나자 다시 갱신의 기회가 왔다. 남편은 납품을 하고 나는 가게에서 장사를 하였다. 경험 없이 시작했기에 처음엔 손님 오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무섭기도 하였다. 반면에 손님이 오지 않아도 두려웠다. 이것 괜히 가게를 차린 것이 아닌가! 차라리 먹는 음식점을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을, 후회도 했다. 때로는 손님이 주문한 물건과 똑 같은 것을 주지 못했을 때는 큰 소리도 오고가기도 하였다. 실수도 여러 번 하였다. 보람도 있었다. 물건이 좋다고 또 찾아오고 물건을 주위에 소개도 해 주고 새로운 거래처도 만나게도 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25년을 운영하면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강산이 두 번이상 바뀌는 세월이 흘렸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 마침내 무한변신을 하려고 25년을 운영한 철물가게의 문을 닫았다.
가게를 하면서 평탄하지 않은 억 겹의 수난을 겪고 나니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표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나도 꿈이 있었다. 동화작가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부도의 위기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책과 펜을 놓지 않았었다. 어쩌면 문학의 꿈은 생명의 동화 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꿈이 있었기에 막다른 골목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낮에는 장사를 해서 빚을 갚아가고 밤에는 검정고시 공부로 자투리 시간 15분을 최대한 활용을하였다. 과목마다 15분으로 정하고 문제를 풀고 책을 읽었다. 내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투리 시간만이 내 것이었다. 중학 검정고시는 연습으로 한 번 본 것이 좋은 성적으로 덜컥 합격이 되었다.
시험이 이렇게 쉽나, 그렇다면 고검도 한 번 해 보자며 덤볐는데 어려웠다. 제일 어려운 과목은 영, 수였다. 아무리 외우고 써도 머리에 담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낮에는 돈의 전쟁으로 요동을 쳐야하니 영어단어가 담아질 리가 없었다. 수학은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 한계는 수학과 영어였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잠을 자다가 깨기만 하면 일어나 밤중이든지 새벽이든지 일어나 세수를 하고 고검시험공부를 하였다. 일곱 번째 고검시험에 합격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짜디짠 눈물이 아닌 달달한 눈물이었다. 첩첩 산중이었던 내 앞이, 캄캄한 터널이었던 내 앞이, 잠깐 사이에 사라진 느낌이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리도, 멍멍대는 강아지 울음소리도, 심지어 짹짹거리는 새 소리도, 소음이 아닌 음악으로 들렸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 고난을 이겨왔을 것이다. 이럴 때 십 년 묵은 채증이 내려간다고 하는 것이리라 속이 뻥! 뚫렸다.
내 나이가 칠순을 코앞에 있는 줄도 몰랐다. 고검까지 합격을 해놓고도 언제나 내 나이는 오십에만 머물고 있는 줄 알았다. 내가 잡고 있는 동아줄이 삭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언제라도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고 미루며 살았다. 그렇게 한가하게 바보처럼 살아온 나에게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공문이 왔다. 내용을 보니 노령연금 대상자라며 서류를 작성하여 동사무소에 접수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흔들렸다. '내가 벌써 노령연금을 탄다고?' 내 나이가 몇인데. 깜짝 놀랐다. 예순도 아니고 칠순이 코앞이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나를 잃어버리고 30여년을 땅만 보고 살았다. 일만 하고 살았다.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았다. 꿈이 있다는 것은 내게는 사치였다. 머리를 쇠망치로 한 대 얻어맞고 나니 제 정신이 들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 했다. 대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25년 운영한 가게를 접었다. 남은 삶은 엄마가 아닌 내 이름 석 자로 살기로 작정하고 세 평짜리 원룸을 얻어서 독립을 강행했다.
공부를 시작한지 12년만인 2020년3월에 드디어 서울사이버대학교 웹 문예창작학과에 내 이름 석 자에 학번을 받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이래도 되느냐고 자꾸만 나에게 물어본 것 같았다. 내 자신 내가 다독였다.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살아가고 싶다고 인생은 두 번도 아니고 딱 한번인 인생을 이제 소풍처럼 살고 싶다고. 그동안 가장의 이름으로 엄마의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수천 톤의 짐을 짊어지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내 나이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내 자신에게 몹시 미안했다. 세상만사에 혹사당하고 살아온 나에게 이제는 내 이름으로 남은 삶을 꿈을 향해 살아도 된다고 위로하고 싶다. 지금은 서툴러도 괜찮으니까. 마침내 무한한 변신을 해도 된다고 오늘도 다독인다.
나는 꿈을 이루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나라는 사람은 꿈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엄마로서 가장으로서 살아야 했기에 꿈을 포기하고 살았었다. 그러나 작가의 꿈만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꿈은 내가 과부로서 벗어나지 않고 숨을 고르며 살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와도 같았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학교 청소부 일을 하고 있다. 벌써 2년이 되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는 내 손자 손녀처럼 사랑스럽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을 보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나는 컴맹이었다. 온라인 수업을 하기 위해서 중고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컴퓨터 배움의 동냥을 서슴지 않았다. 심 봉사가 청 이를 키울 때 젖동냥으로 키웠듯이, 교회 청년에게도 얌체같이 붙잡고 물었다. 심지어는 은행직원에게도 노트북을 들이밀고 배움을 요청했다. 팔순의 할아버지까지도 컴퓨터 ‘컴’자만 안다고 하면 배웠다. 처음에는 독수리 타법으로 배웠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를 들을 때는 가슴이 저려왔다. 유리 조각처럼 흩어져 버린 내 꿈의 파편이 하나하나 모여드는 소리처럼 들렸다. 배움의 동냥으로 배운 컴퓨터로 대학 2학년기말고사까지 마쳤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학교청소를 하면서 공부를 하는 것은 힘은 들지만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늦게 피는 꽃은 있어도 피지 않은 꽃은 없다’고 하듯이 사람도 꿈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남은 삶은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살아간다. 물론 대학공부를 한다고 하여서 훌륭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기왕에 이 길을 왔으니 이제는 방황할일이 전혀 없이 뚜벅뚜벅 가고자 한다.
야구선수인 양 준혁 선수는 내야안타만 150번을 쳤다고 한다. 야구선수라고 하면 양 준혁 선수를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야구 선수일지라도 내야 안타가 없이는 3할의 안타를 칠 수가 없고 홈런도 칠 수가 없듯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수없는 졸작을 쓸 줄 알아야 만이 걸작을 쓸 수가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 나는 모든 것이 서툴다. 온라인으로 공부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내 이름 석 자로 사는 것도 서툴다. 하지만 하고자 하는 열정만큼은 아직은 식지 않았다. 젊음 보다는 나이가 많을수록 더 뜨겁다. 물은 99도에는 끓지 않는다. 1도가 더해질 때 비로소 끓게 된다. 나는 그 1도를 채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석양의 빛이 더 붉고 아름답다는 말이 머리를 채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잊지 않고자 한다. 그동안 내 인생에는 수없는 빨간불이 나를 위협했을지라도 내 사전에는 포기는 없었다. 이제는 파란 신호등불이 깜박이며 내 길을 인도한다. 빨리빨리 가지 않고 추근추근히 뒤는 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련다. 서툴러도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