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장려상 - 미니 자서전]김상문

제2 삶은 즐겁다. 나의 시작이다

잔설이 남은 냇가에 올챙이가 자라면 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시간이 흐르면 개구리가 된다. 개구리는 올챙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 개구리로 성장한다. 올챙이의 삶과 개구리의 삶은 다를지라도 올챙이는 올챙이다. 다만 올챙이의 삶이 튼실해야 개구리가 된다는 것은 진실이다. 속설에 “나이가 선생이야” 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개구리로 태어났는데 60을 들어서기 까지 올챙이 생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정년을 하고서야 그게 보였다.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고 하지만 내 삶을 정년 전후로 나누면 정년전은 올챙이의 삶이었고 정년 후는 개구리의 삶으로 비유할 수 있다. 올챙이 시절은 고문관이었고 무능한 교사 이었다. 당당하게 맞대면서 군대생활을 떳떳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면 무능력한 점 보다는 내 장점을 찾아 빛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만이 가슴을 적신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없이 그냥 동물적인 감각으로만 살아온 올챙이 적 생활에서 벗어나 본래의 개구리로 성장하는 것이 절실한 소명이다. 이는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일도 아니다. 그게 본래의 제자리다. 내일의 개구리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할 이유를 말하고 싶다.

• 고문관으로 출발

1965년 2월 겨울찬바람이 귀를 때리는 날 나는 군 입대 영장을 받아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병 생활에 들어갔다. 훈련병들은 집단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매일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을 받았다. 횡렬 4인, 종렬 10줄 이다. 키순으로 하니까 내가 맨 끝줄이었다. 구령하는 지도자는 맨 앞줄에서 하기 때문에 약간 난청인 나는 구령의 첫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줄줄이 뒤로 돌아 가”를 하는데 나는 줄줄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바로 뒤로 돌게되면 앞사람과 부딪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나로 인해 훈련이 중단되어 우리소대 전원이 기합을 받거나 아니면 나 혼자서 벌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운동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보니 다른 부대원들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쉬는 시간에 혼자서 “뒤로 돌아가 우로 가 좌로 가” 를 반복하는 특별훈련도 따로 받았다.

군대는 제식훈련이 기본이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제식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장병은 별로 없다. 설령 구령에 익숙하지 못해 틀릴 경우라도 특별 개인지도를 받으면 누구라도 곧잘 적응하게 된다. 그런데 난 어쩐 일인지 개인지도를 받아도 변화가 없다. 부대원들은 나의 이런 행동을 보고 “바보냐! 멍청이냐” 하고 나에게 힐난을 주기도 하고, “고문관이 한 명 탄생했다” 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고문관이란 군대 용어로 “어수룩하게 행동하며 단체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훈련병”을 말한다. 정상적인 내가 왜 고문관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잘 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잘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훤히 할 수 있는데도 손과 발이 내 의식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자주 지적 받고 보니 언행도 바보처럼, 그렇다보니 기억력이나 판단력 까지도 희미해져 갔다.

어눌하면서 눌삽한 말투, 흐리터분한 사람 같이 내려 깔린 눈동자, 늘보처럼 움직이는 동작, 주변을 정리 정돈하지 못한 행동 모든 게 정상이 아니다. 매일 아침 훈련장에서 복장검사 할 때 마다 지적사항이 “복장불량” 이었다. 날마다 똑 같은 지적사항이다 보니 그냥 녹음테이프를 틀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훈련병은 고문관이요” 다른 병사들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향도(훈련반장)는 나로 인해 자꾸 훈련이 중단되는 것을 막고자 내 이름표에 “훈련명 김상문” 이 아닌 “훈련병 고문관” 이라고 이름표를 아예 바꿔 달아주었다. 그리고 얄궃게 내 이름을 불렀다 “네 이름은...”하고 부르면 “예 훈련병 김 상문.”이라고 복창한다. 그러면 “야. 네 이름은 고문관이야” “알았어” 하고 재차 다짐을 받는다. “예, 훈련병 고문관” 하고 대답하면 만족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래 앞으로 누가 부르더라도 네 이름은 고문관이야” “알았어.” 하고 주의를 줄 때면 “예, 잘 알았습니다.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목이 터져라 복창했다.

이런 연유를 모른 다른 훈련병들은 “야, 희한한 이름이네, 이름 한번 잘 지었다.” 고 놀렸다. 이후로 부모님이 지어준 “김 상문”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고문관” 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탄생하였따. 나는 ‘김 상문“ 이라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그게 마음이 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문관이란 6-25 전쟁 때 한국 군대에 상주한 미 군사 고문단들이 한국 실정에 적응하지 못한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일이 빈번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어수룩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고문관으로 부르게 된 이유라고 한다.

심리학에 “스티그마” 낙인효과 라는 말이 있다. 부정적인 낙인이 찍힌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어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화하는 현상이다. 훈련장에서 나에게 ‘고문관’ 같다는 말을 하게 되니까 나 자신도 “아예 그런 같은 사람”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문관이니까 멍청한 행동을 해도 돼” 라고 스스로 포기하게 되었다. 제식훈련이 끝나고 무사히 마쳤다는 징표로 각자의 관등성명을 대야 할 때도 “예 훈병 29연대 2대대 6중대 4소대 훈병 김 상문”을 큰소리로 복창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2대대 6중대 4소대의 숫자가 자주 옹송망송해서 더듬거리기 일 쑤다. 매일 저녁 점호에 지적을 받고 보니 정말로 부대원들은 고문관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피그말리온효과, 자성예언, 로젠탈 효과,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는 교육심리학의 모든 용어는 긍정적인 사고가 부정적인 사고를 지닌 것보다 훨씬 효과를 가져 온다는 연구결과다. 내가 직접 겪어보니 역시 부정적인 낙인을 갖지 않도록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이 생활지도의 요제라고 확신한다. 모든 교사나 어른들이 아동들을 지도할 때 새겨야 할 점이다. 나는 ‘고문관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훈련장에서만은 그 말에 순응하기로 했다.

몸짓이 크고 우람한 같은 계급장을 붙인 훈련병일지라도 그들 앞에서는 고문관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물을 떠오라고 시키면 그대로 물을 떠다 바치고, 물건도 사다 달라고 하면 사다 주었다. 또 그들이 구두를 닦아 달라고 하면 내 구두는 더러워도 그들의 구두는 반들반들하게 닦아 주어야 했다. 그들이 부르면 달려가야 하고 시키면 이유 없이 그대로 따라야 했다. 나는 그대로 영혼 없는 병사였다.

날이 갈수록 훈련강도가 점점 세지기 시작 하면서 부대원들의 고통도 뒤따랐다. 부대원들은 심심하던 차에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재연시켜 훈련병들의 고된 일상을 해소시키려 했다. 나의 언행은 곧 그들의 코미디감이 되었다. 나도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아 오히려 잦은 실수로 웃겼다. 아무런 수치나 거부감이 없었다. 이렇듯 훈련병 생활은 자존감 명예심도 모두 떨쳐버리니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가 나를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편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듯 어느 덧 6주간의 긴 훈련생활이 끝나는 날 아침 향도는 마침내 내 이름표에서 “훈련병 고문관” 이라는 명찰을 떼 주었다. 향도가 그 동안의 사유를 말해주고 나니 모두 웃음으로 박수를 쳐 주었다. 나도 지난날의 고문관에서 시원스럽게 훈련병사로 복귀하여 그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서운함보다는 아쉬움이 교차되는 아침이었다. 향도는 ‘상문아 그동안 많이 고생했다“고 위로하여 주고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고문관이 아닌 고문관 훈련 병사 로 지냈던 군 생활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 교사로서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

군제대후 (1967년) 초등교사로 출발했다. 아이들로부터 교사의 품성과 인성이 좋고 실력이 출중하여 잘 가르치는 교사, 학부모로부터 신뢰받고 존경을 받는 교사, 동료교사로부터 능력 많고 인간성이 풍부한 교사 라는 명예를 누리고 싶었다. 교사로서의 자부심이다. 교사는 직업인과 동시에 타인의 귀감이 되는 품성을 지녀야 한다. 그래서 스승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보다도 제자들로부터 잘 가르치는 교사, 동료교사로부터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꿈이고 바램이었지, 현실은 그 반대였다. 예체능교과를 가르칠 능력도 부족하거니와 교실 환경 조성하는 것도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애초부터 “초등학교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사람이 아닌 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요즈음의 학교나 교실은 최신 교육기자들로 넘쳐 나게 가득 차 있고 외부환경도 울긋불긋 해서 사람의 손이 가해질 필요가 없다. 60년대 학교나 교실은 겉모습만 학교지 교실 내부는 목재로 되어있어 우중충하고 연기에 구슬린 창고 같다. 항상 사람 손이 필요했다. 교실 양 측면은 유리창이고 전면은 칠판이고, 후면은 게시판이다. 장식되지 않은 교실은 상상 만해도 감옥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교실환경을 정리해서 교실분위기를 살리자는 것이다.

전면 좌우에 게시판이 있다. 이 빈칸은 시사 또는 행사 위주의 사진을 붙인다. 솜씨 있는 교사는 멋진 글씨로 디자인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각 타이틀은 색종이로 오려서 주제가 확 나타나게 해야 교실이 살아난다. 너른 뒷면은 아이들 작품을 전시하고 특색 있게 하나의 창의적인 주제로 멋지게 꾸민다. 실제 학급 환경은 뒷면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달라진다. 꽃집처럼 가꾼 화려한 색감으로 꾸미는 교실도 있고, 안방처럼 분위기를 살린 교실도 있다. 교실은 글자 그대로 담임교사의 솜씨가 표출되는 경연장이나 다름없다.

교실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과 학습지도를 잘 하는 것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만큼 교실경영은 중요하다. 학교장은 일일이 수업장면을 보지 않고도 가끔씩 순회하면서 교실만을 둘러보고도 그 교사의 능력을 판단한다. 교실관리는 곧 교사의 얼굴이고 경영관이 표출되는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학년 초면 교실환경심사를 해서 전체적으로 우열을 가리고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다.

나는 예술적 감각이 둔해서 환경정리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른 학급의 진행과정을 보고 코앞에 다가가서야 부랴부랴 준비했다. 물론 솜씨가 있는 아이들을 선정해서 각 코너를 정해주고 꾸미도록 했다, 뒷면의 너른 게시판에는 “나도 할 수 있어요” 라는 표제로 학급 전체아이들 작품을 게시하였다. 아이들 작품이라 어긋버긋해서 조화롭지는 않았지만 참여했다는데 방점을 두었다. 우리교실만이 아동중심이고 아동이 참여했다는 자부심으로...

전교 심사 날에는 전교사가 참여하는데 각 학년별로 우수학급을, 재심사를 필요로 하는 학급을 지정하고, 없으면 공란으로 두었다. 물론 무기명이었다. 전교 교직원회의결과 우수학급은 표창하였다. 얼마 후 재심사해야 하는 학급으로 나를 불렀다. 학급심사결과 모든 교사들이 내 학급을 지정했다는 것은 학교장 교감 교무주임이 앉은자리에서 발표했다.

학교장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내 교직생활을 하면서 이런 교실 환경은 처음 보았지” 하시면서 ‘무슨 이유로 교실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옆에서 교감선생님도 한 술 더 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모든 교사들이 본 눈“이라고 했다. 오늘날에야 그런 질문은 우문이 되지만 당시엔 통하지 않았다. 나도 딱히 그 질문엔 대답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예체능분야에 지도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고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시간이었다. 풍금도 잘 치지 못하는 터에 노래 부르른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사범학교 음악실습 할 적에 가장 성적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음악 교과시간에는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고민하고 그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가급적이면 서악을 잘하는 아이들을 사전 연습시켜 부르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저런 사정을 알 수 없는 학교장은 음악시간에 풍금을 사용하지 않는 점을 유심히 살펴보고 학교장은 음악지도에 능숙한 교사와 교체수업을 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수모에 가까운 처방이었다. 그 후 녹음기가 나와서 내 역할을 대신해주어 모면한 기억이 새롭다.

체육활동은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체념했다. 우선 폐활량이 적어 달리기를 못한다는 점이다. 아예 생활기록부에 적어놓았다. 체육시간엘 예외로 인정되어 항상 아이들 노는 것을 참관했다. 그러니까 체육성적은 보나마나다. 마찬가지로 체육시간에는 체육기능이 좋은 아이들을 시범을 보여주고 다른 아이들이 따라 하도록 했다. 물론 지도의 한계를 보였다. 학교장은 몹시 못마땅했다. 어찌 보면 예체능 교과에 무능한 교사라도 지도의욕만 가지면 오히려 이동중심의 교육이라고 우길만하다. 그렇지만 당시엔 8개 교과를 지도하는 터에 예체능교과에 지도능력이 부족한 교사는 무능력자인 것이다. 어쨌든 학교장은 나를 초등교사로서는 부적격하다고 낙인 했다.

더구나 교직생활에서의 체육활동은 매우 중요시 했다. 매주 수요일엔 친목 배구활동 시간을 갖는다. 9인조 배구라 3팀으로 나뉘어 시합을 하는데 나도 빠질 수 없어 참가했다. 배구공을 받지 못하는 나를 향해 상대편에서는 내 쪽에 허점을 있다고 자꾸 집중공격을 했따. 결국 나로 인해 패배를 하게 되자 무능력자로 인정되어 서로 편을 구분할 때는 기피인물이 되었다. 수요일만 돌아오면 나는 머리가 아팠다. 내 이름이 자꾸 올라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군대의 고문관 생각이 퍼뜩 올라 그만 두고 싶었다. 그렇게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렁이 같은 사람일까?

• 제2의 인생은 즐겁다. 나의 시작이다.

정년퇴임 후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일까? 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이곳저곳을 두드려 보았다. 노래교실은 물론 하모니카 기타. 그리고 서예 조각 공예 그림 교실에도 찾아 다녔고, 취미생활로는 틈틈이 수영 등산 심지어 바둑장기에도 정신을 쏟았다. 그러나 내 취미나 능력으로 헤쳐 나가기가 어려웠다. 쉽게 싫증을 갖게 되었고 동료들과도 어긋나서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니 2년 동안 남는 것은 빈손이고 공허함 그뿐이었다.

나만이 가진, 나만이 즐길 수 있는 세상의 무수한 일이 과연 없을 것인가 에 대한 회의감이 갈수록 들었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나의 적성에 맞는 곳이 있을 것만 같았다. 바로 지난날의 방송통신대학 이라는 곳이 떠올랐다. 재직 중에 2개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통신대학은 특별한 재능도 필요 없고 인고를 기우릴 필요도 없다. 오직 끈기와 건강만이 필요했다. 고등학교 때 3년 개근상을 받은 그 저력을 발휘해보자는 오기가 슬그머니 솟았다. 인생의 대반전이고 획기적인 선택이었다. 내가 걸어 가야할 길을 비로소 찾은 것이다.

욕심치고는 초라한 욕망이다. 그렇지만 그 작은 욕망이라도 내가 가진 능력이 작지만 최대한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성취만 할 수 있다면 그게 성공 아닐까? 나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머리가 아닌 끈기로 하는 것이기에 그런 용단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공부성적은 머리로 하지만 출석은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가능했다. 퇴임 후 줄 곳 15년을 헤매다보니 7개학과를 졸업하였다. 방송통신대학에서는 나에게 최다학과상인 “기네스 상”이라는 개근상을 주었다. (.2017년12) 꿈에도 상상치 않은 일이 전개된 것이다. 앞도 뒤도 재지 않고 오직 졸업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온 열매였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 는 속담처럼 또 하나의 욕심이 생겼다. 통신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욕망의 상이다. 모든 재적생이 작성하는 과제물에 성적을 매기고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논문을 선정하여 “우수과제물 제출자에 대한 상” 이다. 과제물 제출하기 위해 관련 참고자료를 읽고 한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통해서 얻어진 상(賞)이라곤 수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직 박수만 열심히 쳤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개인이 가진 재능이 특출하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 재능을 발휘하기위한 끈기를 상찬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결과만을 가지고 얘기하지만 실재는 숨은 의미에 더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오직 60 평생 동안 ‘남에게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는 무력감을 한번 털어보자는 간절함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거나 문법적인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 이 글쓰기의 기본이다. 기본을 이수하기위해 닥치는 대로 도서실에서하루에 서 너 권씩 읽었다. 일 년 동안 읽어보니 느낌으로 잘 쓴 글은 물 흐르듯이 쓴 글임을 터득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국어국문과에 편입해서 글의 구문 상 문법을 익혔다. 처음엔 “주제와 제재 화제”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해 쩔쩔 매기도 하였고 문장 상에서 “주술 호응, 서사와 묘사”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도 몰랐다. 문장공부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피부로 느꼈다. 포기하고 싶었다. 늦은 나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과욕이 아닐까?” 에 대한 의심이 들기도 했다.

우선 학문적인 글을 쓰기위해서는 생활문을 먼저 써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몰두하였다. 잡지에 투고한 사람들처럼 삶의 일부분을 글로 써 보고 싶었다. 말하는 것과 글로 옮겨 써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그래도 해보자” 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다음으로 모방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모방도 창작이다” 는 말도 있듯이 우선 우수 생활문을 그대로 써보고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 잡지에 실린 사람들의 글 솜씨가 부러웠다. 중얼거리면서도 그리고 옆에서 다정하게 이야기해주듯이 소곤거리며 쓴 글은 쓴 사람의 일상생활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바로 글이란 삶이면서 철학이라는 것이다.

나의 삶과 비교해 보았다. 내 삶이 그대로 투영하기위한 엇비슷한 소재를 잡아 나도 그렇게 썼다. 처음엔 매끄럽지 않지만 글은 써 졌다. 내가 쓴 글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꾸 연결이 끊겼다. 이는 부자연스럽다는 말이고 인위적인 설명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주제의식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도 자주 써보고 무엇이 미흡한가를 스스로 비평해 보았다. 그래야 수정이 가능하고 보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재를 찾아 쓸수록 주제를 보는 눈이 생겼다. 즉 주제와 관련이 적은 글을 과감히 삭제해야 하다는 것이다. 재미가 붙었다. 읽는 것은 재미로 하지만 쓰는 것은 몰입해야 써 진다. 그동안 무기력하게 살아 온 노년의 삶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살아 온 노년의 삶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쓴 글이지만 글속에 참 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 좋았다.

한편의 글을 창작한다는 것은 내 생활을 진솔하게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글이란 바로 내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주제를 미화한다거나 없는 것을 지어낸다는 것은 삶을 형해(形骸)화 하는 것이기에 죽은 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은 나의 거울이다. 건강관리 협회에서 “나의 건강생활에 관한 생활문”을 공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겪은 경험을 그대로 써보고 싶었다. 나의 척추협착증은 TV 시청하는 자세와 평소에 나쁜 생활 태도가 주요인이었고, 고혈압은 과도한 TV 시청으로 인한 운동 부족과 편식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극복하기 위해 병인을 찾아보았고 이게 치료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결과는 원인을 밝히면 치료방향이 결정된다. 이는 지동설을 주장한 학자만큼의 중대한 진리다.

나는 TV 시청을 줄이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위한 자세 교정과 이에 따른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차곡차곡 쌓듯이 정리해 보았다. 전후과정이 일관성을 유지 되었나? 주제 의식에서 벗어난 대목이 있는가?를 체크하면서 수정하고 보완했다. 시집보내는 딸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건강관리 협회에 보냈다. 처음 내 경험을 썼지만 당선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냥 써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도 뜻밖에 장려상을 받았다.

이번에는 식품 의약품 안전 처에서 질병을 치료한 경험을 공모한다는 것이다. 역시 생활습관을 교정하는 합리적인 음식 섭취하는 방법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하였다. 당뇨나 고혈압에 좋은 식품을 섭취하고 해로운 음식을 자제하고 필수적인 걷기 운동으로 몸무게를 줄이는 등 각고의 노력을 정리해 보았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그 의미를 진술하는데 여간 어려웠다. 서로 간에 연결이 끊어지고 문장이 길게 설명조로 되어 읽기가 부자연스러웠다. 좋은 글은 숨 막힘이 없어야하고 전체적인 주제 의식이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나의 글은 어색한 장면이 서로 상충되어 있음을 찾아내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을 했다. 작품이란 이렇듯 수없이 많은 퇴고의 과정이 없이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미흡해도 과정을 거쳤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제출하였다. 기대한다는 것은 실망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보니 그제 서야 글을 쓴다는 것은 노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젠 학문적인 글을 써보고 싶었지만 그 형식을 알 수 없었다. 통신대학 우수과제물 코너에 들어가 수상자들의 작품을 십 여 편을 읽어보았다. 주제의식과 형식 그리고 학문적인 배경 등 그리고 논리적인 수사법을 나름대로 특징을 잡았고 참고 문헌 인용에 대한 이론적인 기술을 익혔다. 특히 교수님들의 당선자에 대한 비평에 주의를 기우려 읽어보았다. 대강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각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문장과 문장과의 연계가 끊기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이 연속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주장하는 이유도 합리적이어야 하지만 그 근거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문학과 “한국 한문학의 이해” 라는 과목에서 “한국 한시(漢詩)의 발달과정을 시대별로 정리해서 서술하시오” 라는 주제가 제시되었다. 논문보다는 시대적 배경에 따른 특성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이니 다소 쉽다 생각이 들었다. 막상 주제를 접하고 교재를 읽어볼수록 삼국시대로부터 조선후기시대의 발달과정이 서로 혼재되어 그 특성을 한 말로 요약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서론에 들어가야 할 말, 결론에 들어가야 할 말을 미리 써놓고 본론에서 한 시의 개념과 발달과정을 요약하면서 각 시대별로 분량을 배정하여 어느 시대에 치우치지 않도록 고치고 또 고쳤다. 잘 이해되는 것은 길어지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짧아지고 분량을 맞추는 게 너무 어려웠다. 과제물 특성상 단어를 한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일이 한문사전을 찾아 고치는 일로 마무리를 지었다. 대학의 논문작성도 이처럼 어려운데 석사나 박사의 논문을 쓰는 것은 이에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각고의 정성을 기우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눈물겹게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든 과제물 작성을 하고 보니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도 아팠다. 그렇더라도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욕심을 내어 할 수 있었다는 푸근함이 나를 압도했다. 한편의 과제는 내 손을 떠났다.

한 달 후의 일이다. 과제물 성적이 30점 만점이었다. 2학기가 되자 인문학부에서 우수논문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혹시나 해서 응모해 보았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벌어졌다. “2018년도 2학기 인문학부 최우수과제물상”이 나에게 주어졌다. 초등학교 때 일이다. 달리기에서 맨 날 꼴등한 것을 본 어머니께서 “운동회에 가봐야 내가 꼴등만하니 그걸 구경하는 내 맘이 속 터진다.” 는 말씀을 하시고 그 이후론 한 번도 운동회에 구경 오지 않으셨다. 그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한 번도 남 앞에서 상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터에 처음 받는 상이고 보니 80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생전에 꼴등만을 보아온 어머니에게 나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돌아왔구먼요?”

“다 살았다.” 가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는 것이다. 겨우 이제 발걸음을 딛는 처지에 다른 욕심을 갖는다는 것은 “동키호테의 만용이 아닌 가? 아니다. 80을 넘어 새로운 길을 개척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성공담도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불끈 솟아올랐다. 이제 나의 시작이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아니지만 개구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다. 나는 오래 동안 올챙이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퇴임 후에야 비로소 개구리로 변신되었다. 그 삶이 바로 통신대학이라는 마지막 동반자를 만난 것이다. 노년의 마지막 돛대와 삿대가 되어주는 통신대학에서 제 2의 인생을 즐기고 싶다.

실낙원을 쓴 밀턴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사느냐 가 중요하다” 고 말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통신대학이라는 놀이터에서 노후를 즐기고 상을 타는 기쁨도 누리게 되니 일석이조의 삶이 아닌가?, 노년에도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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