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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미니 자서전]이창대

편마암빙하에 올라서 내려다 본 산동네

종묘 공터 바둑 공원을 지났다. 이곳은 할 일 없는 사람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나이가 들거나 건달이 시간을 보내기는 아주 좋은 작은 공원이다. 여름이면 그늘이 형성되어 있어서 좋았다. 넓은 공간에 대략 기백 명 정도가 바둑을 관전하거나 대국을 한다. 이런 건달 공간은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 나는 오늘 따라 이곳을 들렀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바둑 두는 모습을 관전하고 주변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오늘은 날씨가 싸늘하다. 한잔술집에서 두 잔을 하였다. 정신이 황홀하더니 갑자기 지나간 긴 삶을 정리를 해 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결산을 해 보고 싶은 것이다.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 등으로 분류하였다. 힌 시간 동안 인생 을 구분하여 노트에 줄거리를 적어서 집으로 향했다.

나는 약 20여 년 전 사업에 실패하고 마지막에는 주거지를 쫓겨나는 창피한 삶을 겪었다. 사업 이전에는 정시에 군대를 제대하고 정시에 직장도 쉽게 얻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무언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직장 업무와 가까운 기술 분야 사업에 손을 대었다. 물론 첫째는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맥 이 전무하다시피 한 사회 초년생은 일 몇 건을 하고 계속 일을 엮지 못해서 활동비마저 떨어졌다. 그러고 나니 자연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밑천이 없으니 생긴 결과다.

자유업을 하며 긴 인내 끝에 포스코 제철재단과 우주, 해양관 체험교육 공사를 수의계약으로 수억 원 규모의 큰 공사를 수주했다. 수주하게 된 경위는 주변에서 나의 경력을 보고 기술 지원을 요청하여 공동으로 공사를 하자는 제안으로 성사된 것이다. 나는 기술을 지원하고 상대 업체는 자본을 대는 식이다. 약정하고 처음에는 기획 설계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나의 주도로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손잡은 업체는 자금을 못 융통하여 중간에 손을 떼어야 하는 예상치 않는 환경을 맞이한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 단독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상대 업체로부터 약정한 돈을 못 받을 상황이 되고 내가 만든 팀원에게 줄 인건비를 내가 뒤집어썼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고민을 하다가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추진한 일이라 조금만 투자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하늘이 기회를 주었다는 생각에 인수를 하고 말았다.

전화위복이라 생각하고 얼굴 하나로 필요한 공사 자금을 이곳저곳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녀 해결했다. 이것이 가능한 또 다른 요소는 포스코 일을 하고 있으며 진전된 일이라 지원이 가능했다. 이 일을 해서 좀 커 보라는 주위의 격려성 지원이었다. 너무 큰 공사라 아슬아슬하게 해결했다. 그런 끝에 일 년 동안 제작 설치를 하여 겨우 마무리 지었는데 금융비와 비효율적인 관리로 빚을 져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 당시에 공사는 과학인테리어 치고 무척 컸다. 4억이 넘었다. 이때는 집 한 채 값이 5천만 원 정도 할 때다. 손실의 근본 원인은 포스코 재단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포스코 박 회장한테 탄원을 하여 다른 보상 일거리를 맡아서 3년 만에 본전을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다른 곳에서 운이 좋게도 특이한 상황이 생겨서 이익이 많이 나는 관급공사를 맡아서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비교적 늦게 집을 장만 한 것이다.

그리고 보니 노후 준비가 필요했다. 좀 더 획기적인 수입 창출을 하는 사업을 찾았다. 이리 저리 시장 조사를 하는데 갑자기 정보화시대 열풍이 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몇 가지 환경이 나를 유인했다. 첫째는 카이스트 교수가 쓴 나도 벤처를 할 수 있다에서 얻은 자신감과 벤처 지원 정책과 주변 지인이 도와줄 것이라는 세 가지 점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물론 내가 이과를 전공해서 아주 잘 어울릴 거란 생각도 했다. 그래서 늦기 전에 정보화 시대를 맞아들이는 것이 시대를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몇 년 전에 포스코 재단에서 비참한 실패를 하여서 비싼 수업비를 내고 사 업 노하우를 터득해서 자신이 꽉 차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두 번 실패하랴 싶었다.

마침 주식 경기가 살아나서 일억 정도의 현금이 있어서 이를 밑천으로 하여 법인 설립을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거액이 들어갈 것 같아서 벤처기업을 만들기 위해서 주위 친지를 통해서 주식 공모를 하였다. 그래서 3억 정도의 기본 자금을 모아서 주식회사 싸이홈을 설립하였다. 나는 이들을 우호주주로 하여 상장까지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각종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여 이십여 건 정도를 특허내고 퀴즈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때는 코스닥 열풍이 불어서 수익 구조만 창출하면 무조건 투자하던 시대다. 그래서 확장하다가 보니 운영비, 경품비 등 지출 규모가 생각 보다 아주 커졌다. 다급해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추가로 주주 모집을 시도했으나 주주 모집이 시원치 않았다. 이때는 IT열풍이 기울어질 때다. 그러나 특허가 여러 개가 있어서 기댈 자산이 있다고 보았고 끝내는 보증 기금을 이용하고 적금을 깨어서 출구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수익은 금방 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자금도 전부 바닥이 나서 마지막에 백방으로 기업 인수자를 찾으려 하였지만 허탕으로 고생만 잔뜩 하였다. 결국 기업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상복구 미련과 조금만 고개 넘으면 회생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코스닥 꿈은 살아지고 현실이 긴박하게 된 것이다.

점점 어려움은 커졌다. 그제야 지난날을 잠깐 돌아보았다. 문제는 과거 입지전적 기업 성공신화를 믿고 너무 크게 벌린 것이 탈이었다. 한 번 발이 빠지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 전진 할 수밖에 없는 상항이 되어버렸다. 우선 구조 조정도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진 업체를 축소 운영이라도 하여야 되었다. 그 동안 어렵게 획득한 특허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대표 변리사와 상담한 끝에 특허법인에 위임해서 몇 개 회사에 경고장을 보냈다. 특허 침해 업체와 협상을 하여 만든 돈은 특허침해 화해 조건으로 일 억 정도를 확보하였다. 우선 급한 불을 껐지만 이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변리사 수수료 주고 나머지 돈으로 기관투자처를 물색할 때까지 운영비로 쓰기로 하 동안 알아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마침 K 은행이 약 오백 개의 벤처에 자를 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렇게나 많이 투자하는 것을 보면 우리 싸이홈 실적도 충분히 지분투자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K은행 본점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기진맥진 하여 포기하려다가 이런 좋은 정보에 혹하여 다시 한 번 더 발동을 걸어 보기로 하였다. 더구나 알아보니 K 은행장은 고향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나의 사업 실적과 경력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여 기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아이디어, 자금 조달, 인력관리 하느라고 기진맥진 하였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신발 끈을 매고 을지로 입구에 있는 은행장실을 찾아갔다. 갔더니 은행장은 자리에 없고 비서실장이 있었다. 일단 비서실장과 인사를 나누고 관련 자료를 보여주었더니 비서실장은 당장 담당 부장에게 전화를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디어 내용 파악을 어느 정도 하고 긍정적이니 지시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지역 광진구 지점장에게도 전화로 지원해 줄 것도 요청하였다. 나는 무척 고무적이라 심신이 들떴다.

그 동안 상승 하강 고개를 많이 넘었고 험난한 고개를 넘을 때 마다 그래도 역시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을 다시 가졌다. 다음날 동네 지점장실을 찾아갔다. 찾아갔더니 지점장은 무척 반겼다. 인사가 끝난 후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우선 활동비가 필요하다고 하였더니 오천만 원을 융자해 주겠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 나는 담보를 초과했다고 말하였더니 지점장은 이에 구애하지 않고 대출해 주었다. 나는 윗선의 약효가 이렇게 빨리 나타나나 싶어 놀라며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 벤처지금 인수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앙 은행장이 이야기 한 것이니 으레 일이 잘 풀릴 것이란 믿음이 생겼던 것이다. 거기다가 눈치 빠른 지점장도 상황 판단을 해 보니 가능했기 때문에 대출을 해준 거라 확신했다. 지점장 정도는 대단한 안목의 소유자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브리핑 자료를 보충 준비하고 담당 부서를 찾아가서 담당자를 만났는데 응대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우선 당혹감이 들었다. 서류를 보자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였다. 위에서 지시를 내렸으니 떨떠름하여 그러지 않나 싶어 겸손한 마음으로 필요 서류를 제출하고 현장 조사를 요청했다. 그랬더니 그런다고 대답만 하고 그 이상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서류를 그냥 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비서실에 연락하여 절차를 밟은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비서실장은 다시 지시할 것이란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다시 담당자를 찾아가서 사정도 이야기 했지만 알았다는 이야기만 하였다. 그 후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담당자에게 애걸하기를 여러 차례 끝에 실사를 나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오는 날 사무실 분위기를 깨끗이 정돈하고 기다리다가 오후가 되어서 도착하여 설득에 만전을 기했다. 열심히 심사 준비를 하였으나 질문 사항을 들어보니 마지못해서 사무실 실사를 나온 것 같았다. 결국 결론을 정하고 마지못해 실사를 나온 것으로 단정하고 엄청 실망을 하였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소식이 없어서 망하는 입장에서 답답하고 소식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하였더니 끝내는 불가 판정을 받았다. 가슴은 철렁하였다. 이를 기다리면서 대출을 몇 곳에서 받아서 빚만 잔뜩 지게 되었다. 여러 은행에서 소액이나 받을 수 있어서 신용이 건재해서 좋다고 했는데 이제 빌릴 곳도 없어서 주저앉게 되었다. 처음부터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이다. 결국 고향 은행장의 인맥을 몰랐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알게 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서 참으로 야속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비서실이 움직였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이제 막다른 코나에 몰렸으니 할 수 없다 싶어 사무실을 폐쇄하기로 하고 정리 절차에 들어갔다.

사무실 폐쇄 작업을 하면서 우선 직원들 정리를 하였다. 직원들에게도 미지급은 전부 정리하였다. 다들 해결하였으나 평소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여직원 하나가 임금 문제로 끈질기게 괴롭혔다. 다름 아니라 신입사원 수습기간 임금 계산 방법이 문제가 된 것이다. 나는 다 지불 되었다고 하면서 회사의 방침대로 거절하였다. 서로 의견이 팽팽히 맞서다가 해결되지 않으니 여직원은 돈 받아내기 위해서 해결사 회사에 의뢰 하였다. 나는 해결사에 의뢰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사회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해결사는 끊임없이 연속으로 전화 독촉을 하여 괴롭히는 것이다. 나는 하도 자주 협박 전화를 하니 전화 받는 것이 겁이 날 정도였다. 다른 급히 처리할 문제도 싸였는데 일을 못할 정도였다. 결국 상대방에서 그 근거를 대라고 하여 근거를 팩스로 보내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임대 보증금을 받는 일이다. 보증금이 남은 유일한 재산이다. 이것도 임대인이 갑질을 하니 또 한 번 승강이를 벌려야 했다. 그 동안 문제가 연속으로 나타나서 뒤처리 하는 일이 밑도 끝도 없었다. 나는 건물 여주인을 평소에 좋게 보았다. 처음 임대할 때 내부 인테리어와 시설을 제법 꾸몄다. 천장에 냉난방기기도 값 비싸게 들여서 시설해 놓았다. 그런데 사무실 폐쇄를 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랐다. 사무용 책상은 물론 기술서적도 돈 한 푼도 못 건지고 그냥 버려야 했다. 버린다니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그런데 냉난방기는 금액이 제법 나와서 고물상에 팔아버렸다. 대충 정리하고 남은 임대 보증금을 받으려고 하였더니 주인아줌마는 원대 복구 하라는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서 생각해 보니 임대료를 높여서 임대를 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때어가 버렸으니 그 기대가 어긋난 것이다. 그래서 내부시설을 원상복귀 하라는 트집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 냉난방기를 때어간 업체에 사정사정하여 다시 돈을 더 주고 회수를 하였다. 그런데 이것 또한 말썽이 생겼다. 제자리에 설치하여도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기술자 저 기술자 불러도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모른 체하고 주인에게 보증금을 달려고 하였더니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임대인이 새로 들어오면 준다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음에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일들을 정리하며 돌아다녔는데 보증금 입금을 기다려도 입금되지 않아 독촉을 하여도 차일피일 하였다. 알아보았더니 새로운 임대인은 벌써 들어왔다는 것이다. 드디어는 청소비 핑계 등을 하여 감액 처리 하려 하였다. 하도 화가 나서 위법 사항을 적시한 내용증명서를 보내니 그제야 다 받을 수 있었다. 망한 자에게 이런 악덕 건물주라니 정말 저주스러웠다. 돈이 급한데 끝내는 뭉개려고 하니 눈물이 글썽였다. 일은 계속해서 이리 터지고 저리 터졌다. 금융권 납부 이자는 아예 어려워졌다. 이제 그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제 결단을 내야했다. 그리고 어느 날 계속 납부해온 금융권 이자 내는 것도 동시적으로 동결하는 결단을 내렸다. 수입이 없으니 원금도 못 갚을 상태인데 더 끌 수가 없었다. 이제 시달리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에는 남은 것은 아파트가 압류가 될 절차만 남았다. 들어올 돈이 없는데 빚을 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묵묵히 불안의 시간만 기다려야 했다. 앞길은 캄캄하였다. 돈 한 푼도 없고 셋방 돈도 걱정이고 활동비 떨어질 날도 가까이 오나 대책이 없었다. 특별히 걱정되는 것은 셋방 얻을 돈이 없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뒷일을 생각해서 재산을 감추어 놓지 않고 바보 같은 죄테크에만 열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멍청한 사람이 사업을 했다니~ 하면서 자조 섞인 생각도 들었다. 하여튼 나는 이미 빈손이라 떠난 차는 어찌할 수 없었다. 아내는 보험 등 별의별 일을 시도 하다가 마지막에 식당일을 나갔다. 나는 미안해서 뭐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외부에 나가 장사하는 이 친구 저 친구 가게에 가서 기식을 하였다. 그러면 어떤 때는 교통비를 받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고향 행사 빌미로 동생에게 품위 유지비를 달라 하여 썼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별로 없으니 머릿속은 항상 교통비 걱정이었다. 어딘가 돌아다녀야 하니까 말이다. 부초 인생이다. 막걸리 한 병을 가게에서 사서 오이로 안주를 하며 한 끼를 보내는 일이 허다하였다.

아내와 대화도 없다. 아내는 원망에 가득 차 있다. 피땀 흘려 늦은 나이에 장만한 아파트를 없앴으니 그럴만한 하였다. 그래서 나는 말 잘못 건네면 오히려 화근이 생길까싶어 말을 안했다. 아마 10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보낸 것 같다. 하여튼 최저 경비인 교통비도 나올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노숙만 안 했지 모든 설움은 다 받았다. 장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비를 빌릴 곳도 없고 압류 공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자상거래도 못한다. 계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회생제도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자금을 만들어 놓고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된 사람에 해당되는 좁은 문이다. 그리고 나이도 있고 다리도 교통사고로 대퇴부를 다쳐서 절룩이니 활동이 제약되어 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 어느덧 법원 통지서가 순서대로 진행되어 아파트는 압류되었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떠날 날뿐이다. 아무리 해도 묘수가 없다. 늘 불안한 마음으로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데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이때가 한 여름이라 꼼짝 없이 쉰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뒤로 자빠졌다.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아내는 조금의 월급으로 냉장고를 샀다. 냉장고가 들어오니 압류 건이 생겼다는 생각에 마음은 오히려 불안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니 이번에는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 이런 일이 생기니 내 마음은 더욱 조여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염치없지만 모른 척 했다. 이것 또한 생활필수품이다. 아내가 할부로 샀다. 정말 거짓말 같은 현상이 나타나더니 이번에는 가스레인지가 고장이 났다. 갈수록 불운의 연속이었다. 정말 하늘은 너무 하다는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아내가 마련한 것 이다. 나는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것이 말로 죄인인 것이다. 죄인이 따로 없다.

시간이 흘렀다. 채무 독촉은 무섭도록 해댔다. 집에는 늘 빨간 통지서가 들어섰다. 독촉하는 종이를 읽어보면 공포를 느낀다. 빨간 통첩물이 여러 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배달되었다. 통지문을 보면 울긋불긋 총 천연색이다. 이를 받으면 며칠간 공포에 잠겨서 일도 못한다. 생각은 온통 굵고 가늘게 선을 그은 울긋불긋한 색으로 정리 작성한 통첩장 글귀에 침범 당한다.

가족이 상처받을까 걱정하여 속내를 아내에게 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달된 우편물 시간을 지키고 있다가 먼저 주어서 읽어보고 없애 버렸다. 이것을 가족이 보면 얼마나 가슴 떨릴까 생각해서 미연에 방지 하는 것이다. 정말 자본주의 단점의 실체는 이런 것인가를 체험하고 보니 제도의 사전 학습이 참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사람을 완전히 죽여 가는 과정이 이렇구나 하고 저항까지 생겼다. 역시 인권 후진국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친구도 만날 수 없고 닥친 문제 때문에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답답하면 친한 친구만 만나서 다 른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마음이 불편하면 아무 것도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른 생계 해결 거리를 얻으려고 노력하였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일자리를 얻는 것도 다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삶 자체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어서 나 같은 이상한 인간이 태어났는지 머리가 벙벙했다. 그래도 직장을 다닐 때는 잘 나갔는데 모든 것이 헛것이 되었다. 인간 존재 상태를 보니 구름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실존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삶도 죽음도 아닌 경계선에서 이 세상을 떠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모양이다.

협박의 공포를 식히기 위해서 밖으로 나다녀야 한다. 교통비는 어떻게든 장만해서 지인을 찾아 나섰다. 혹 몇 사람은 도와주는 경우는 있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고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 많은 특허를 활용하여 투자자 또는 특허 판매를 찾았지만 특허도 별 볼일 없는 휴지였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소개하여 특허 몇 개를 용돈 정도 받고 팔았다. 그 돈도 소개한다는 사람이 슬그머니 꾸어달라고 하여 일부는 떼었다. 게다가 아버지마저 노환이라 병원에 계신다. 내 생의 모든 리듬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면회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설령 면회를 간다고 하더라도 생각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이제 그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는 연령대와 신체적 활동 제약이 있어 방향을 새로 잡아야 했다. 이제 돈 없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칼럼 같은 것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글 쓰는 소질은 있었음으로 연습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소설 쓰고 시 쓰 는 자유직업을 갖고 싶었다. 우선 카페 글 올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나의 글이 그렇게 인기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블로그 열풍이 불어서 블로그도 하여보았다. 비교적 꾸준히 하였지만 파워 블로거는 한참 못 따라갔다. 그것도 소문만 요란했지 그렇다고 이를 매개로 글감을 주는 곳은 없었다. 시간은 남았다. 무언가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일기 쓰기를 했다. 15년 정도 끊임없이 썼다. 일기 쓰는 습관 하나는 지금도 지키고 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아파트를 떠나기 전에 커다란 인생 충격이 있었는데 그것은 포스코 제철재단과의 거래에서 발생한 고행의 긴 행로였다. 약 5년간이나 쉬지 않고 진행된 생존의 몸부림 과정을 소설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 기회에 이를 바탕으로 소설가로 성장하고 싶었다. 그곳 포항 공사를 처리한 과정에서 생긴 긴 고통이, 생각의 바닥을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양을 쓴다는 것은 나의 부족한 작문 능력으로 볼 때 어려운 일이었다. 구성을 어떻게 하며 전개를 어떻게 하며 독자의 시선을 끌도록 양념을 어떻게 가미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작법을 찾아보고 화법 활용방법도 공부하였지만 역시 서술 기술이 막연하였다.

그러던 중 중앙 일간지에 논픽션 현상 공모가 있어서 논픽션으로 쓰는 것은 과정 서술이니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나간 날을 기억하고 자료를 들추어서 책 한 권 분량을 만들었다. 그리고 소설 쓰는 인맥을 찾아서 친구 소개로 소설가 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쓴 것을 보여 주고 조언해 달라고 하였다. 간단한 접대를 하면서 까지 노력하였으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냥 소설 흐름이 잔물결 치듯 이 흘러간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니까 극적인 반전 표현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 후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리저리 자문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노력하였으나 보기 좋게 결과는 낙방이었다. 일억의 끔은 하늘로 사라졌다. 나는 천리마에 나오는 백락을 못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을 만날 운이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안 되니 핑계 대는 것이다. 실패를 연속으로 하니 그렇게라도 위한을 해야 되었다.

그렇게 소설을 몇 권 썼지만 소설가의 인맥 속에서 훈련을 하지 않아서 성공을 못했다. 사실 소설가와 교류가 필요한 것은 알았지만 워낙 궁핍하여 엄두를 못 낸 것이다. 소설작법을 읽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한 번은 헌 책방에 가서 서울대교수의 소설작법을 읽어 보고 나서는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끝에 가서는 서울교대서 공고한 논설문 작성법 정도는 실무에 도움이 되었다.

글쓰기 방식으로 수익 창출을 하다가 보니 별의 별 길을 다 찾았다. 이번에는 모 인터넷 신문에 내 글을 꾸준히 올렸는데 열심히 하면 거마비 정도는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도 없어서 그 이상 글을 올리지 못했다. 그것도 헛일이었다. 그래서 한 출판사 친구에게 원고 편집을 도와주면 용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부탁을 하였더니 마 침 내 전문 분야 일이 관계되는 연감 편집하는 일이 있어 몇 푼을 받아서 금쪽 같이 썼던 일은 있었다. 그러고 다른 일거리는 없고 칼럼이라도 쓴다고 끄덕대었지만 사막 길은 끝이 나지 않았다. 이제 그 이상 글 동냥할 때가 없었다. 그렇게 유랑하다가, 머리를 다른 데로 돌렸다. 궁즉통(窮卽通)이라는 말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는 뜻이다. 청량리 여동생 가게를 찾아가서 어슬렁거렸더니 오빠의 형편을 알고 집에 갈 때 고기나 사가라고 하여 돈 얼마를 집어주면 사는 척하고 실은 내 용돈으로 다 흘러들어갔다.

항상 남의 신세를 지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 터널을 지나고 싶어 살피던 차에 전단지 광고를 보고 한 업체를 찾게 되었다. 문화일보 곁인데 놀랍게도 정년퇴직한 동네 세무 공무원을 만났다. 공무원 하면 연금도 대단할 텐데 의아했다. 한편 세무 공무원도 이곳에 근무하니 신뢰가 되었다. 담당 상무는 다단계지만 나에게는 연구직 일이 용인에 있다고 하여 조금 있으면 결과가 나올 것이라 하여 기대했다. 그런데 내부를 보니 다단계 이외는 하는 일이 없고 직원들도 보니 상급자를 닮아서 사기꾼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중견 대기업에 있던 사람도 똑같은 방법으로 후진을 꼬여서 과실을 따먹는 것이다. 다들 속아서 상무직을 하는데 알고 보니 돈으로 사는 직함이었다. 상무가 되면 독립적으로 전단지에 광고를 내어 구직자를 꼬여 이들로부터 물건을 사라고 하여 이익을 보는 구조다. 정말 도깨비 세상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도 궁핍하면 두뇌가 정상이 아니게 되는 원리가 있은 것 같았다. 무언지 모르게 착했던 사람도 그 집단에 홀리고 집단의 경영방침에 홀리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삼천만원을 주고 상무직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몇 달이라도 겨울 동안 시간을 보내려고 오십만 원을 물건 값으로 건강식 물건을 샀다. 그리고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니까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는 것을 수장 전무는 대단히 싫어하였다. 그렇게 눈총 받는 생활을 얼마 동안 하다가 실적이 없다고 식권을 주지 않아서 그만 두었다. 고용계약서도 없이 어려운 사람의 간을 빼 먹는 것이다. 참으로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세상, 야릇했다.

이런 가운데도 소설에 창작에 대한 미련은 끊이지 않았다. 나의 속사정도 모르는 한 소설가는 나 보고 소설에 매달리면 불치의 병에 걸린다며 미련을 버리라고 말렸다. 그러다가 큰 일 난다고 하였다. 주위의 비웃음 속에서도 자전적 소설을 완성하고 지인 출판사의 도움으로 출판하였지만 이 또한 참패하였다. 결국은 문학성이 결여되었고 무명이니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고 불안 속에 지내는데 전단지를 보다보니 공공근로 모집이 나왔다. 내일이 접수 마감일이었다. 이거 될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시청에 가서 접수 하였더니 운 좋게 선정되었다. 공공근로도 쉽게 되지 않지만 세기적 금융위기일 때 정부에서 경기 부양을 한다고 하여 휩쓸려서 선정 되어 약 10개월가량 수당을 받았다. 용마산 환경 정비하는 일을 하였는데 참으로 딱한 사람도 있었고, 사고 친 전과자도 있고, 멀쩡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기회에 산에서 살다시피 하니 마음이 일단은 후련 했다. 삼림욕을 하니 머리도 맑아졌다. 용돈에 도움이 되어 일단은 작은 평화를 얻었다. 말 많은 사람들이 많아서 어울리자면 같이 어울려야 했다. 개인 약력을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별난 사람이 나타나서 회장님 하고 부르는 덕택에 주목 받는 존재가 되었다. 어느 비오는 날에 공원 녹지과 직원이 공원 구석 간이 집에서 보신탕으로 점심시간을 가졌다. 이때 장마비가 엄청 와서 귀가 조치를 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자기들끼리 식사하고 우리는 굶고 비를 피해서 있게 되었는데 참다가 참다가 일찍 귀가 시켜달라고 이야기 했다가 녹지 과장에게 혼이 난 일도 있었다.

그 후에 동생 사무실에 큰 공사건이 있어서 가서 일을 하고 내 개인 생활비 정도를 4년 정도 월급으로 받아서 썼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러다가는 인생에 하나도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내 삶과 생각을 담을 시를 쓰겠다고 하여 구청 문화원 시 쓰기 반 에 등록했다. 시인의 이력을 보니 중앙지 등단 시인이 지도한다고 하여 접수하였다. 표현법을 배웠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수년을 쓰니 숙달이 되었다. 그동안 살아온 이력이 뒷받침 되어서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지금은 나름대로 매일 시를 쓰고 있다. 시를 쓰면서 시문학에 대한 이론과 철학, 관련된 예술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들 분야를 접하는 것도 다 시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집 하나를 내었고 앞으로 최하 5집을 쓰면 나의 모든 사상과 삶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를 쓰니 엄청 좋은 힐링이 되었다. 시 쓰는 일이 흥미진진하였다. 마음 아팠던 것도 아름답게 되살아났다. 시는 인생 전체를 종횡무진하는 좋은 인도자가 되었다. 과거의 아픔도 아물어갔다. 어쩌면 누구 못지않게 압축된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신세 끼친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감사하며 살련다.

나는 어릴 때 시골치고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큰 부잣집은 아니고 대체로 부잣집 축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형제가 많았는데 형제가 수가 하나일 때는 귀여움을 많이 받았는데 동생이 태어나니 덜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엄하게 느껴져 아버지 앞에 원하는 말을 못했다. 즉 눈으로 홀기면 내가 지례 겁을 먹고 조심하였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자유로운 놀이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네 주변도 야산에다 논밭이 별로 넓지 않았다. 그런데 동네 앞에 흘러가는 졸졸 흐르는 시냇가는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집을 떠나서 읍내에 있는 중학교를 진학하였다. 다들 가난하니 30명의 학생 중 3명 정도가 진학하였다. 중학교에 가서 자취를 하는데 용돈이 없다시피 하니 궁한 데로 지냈다. 일요일이면 시골에 가서 쌀과 고추장 기타 부식을 매고 한 주일을 견뎠다. 이렇게 해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괜찮은 대학을 졸업했다. 군대 생활은 노량진 육군기술 연구소서 하였다. 제대와 동시에 운이 좋아서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것이 순탄해서 나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으로 자부하고 미래에 대한 큰 꿈을 키웠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마음은 항상 가정이 흩어졌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족이 다 흩어졌으니 먼저 가족을 정상으로 하여야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버지는 복덕방 한다고 개발 지역 중곡동에서 이곳저곳 전매를 하였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땅을 팔아서 시청 앞에 있는 광진건설에 넣었는데 결국 날려서 할 수 없이 복덕방을 한 것이다. 집도 하나 없고 어려우니 퇴직을 하여 사업을 꿈꾸게 된 것이다. 퇴직할 때는 학교에 미니 전시관 설치 에산이 많아 직장에서 연마한 기술로 독점할 수 있다고 자신을 하였다. 그러나 밑천이 없으니 몇 개의 일감만 수주했고 계속 할 수 없으니 떠돌이가 되었다. 그래서 집 마련 꿈은 사라지고 내 몸 하나 잠잘 곳만 찾았다. 끝내는 나라도 빌붙어 살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친구가 운영하는 청담동 태권도장이었다. 오갈 때가 없으니 그 친구도장에 가서 기식을 하다가 그곳도 떠날 형편이 되었다. 그 때는 한창 강남 개발이 일어날 때다. 그래서 청담동 소천빌딩 옥상을 빌려서 과외로 생활하게 되었다. 옥상은 물탱크실로 그 틈바구니에 난로를 놓고 생활을 하였다. 물탱크는 수시로 물 흐르는 소리가 나서 시끄럽기보다 낭만스러 웠다. 겨울에는 연탄난로를 피웠다. 그런 환경에서 과외를 하였다. 그곳도 인원이 늘지 않아서 얼마 있지 못하고 서소문으로 갔다. 친구가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잠 자고 밥은 먹었지만 용돈은 전연 없었다. 용돈 달라고 하면 도망가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여 나는 그런 사고로 부려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돈을 만들어서 사업을 하려고 하였지만 인맥이 없었다. 고향 사람을 만났지만 가능하지도 않고 창피를 온 고향에 퍼트리는 꼴이 되니까 엄두도 못 냈다. 큰마음 먹고 찾아보았지만 그 앞에 서면 아무 소리 못하고 돌아섰다. 이렇게까지 오랜 동안 유랑의 연속을 면치 못하니 가정생활이 무척 그리웠다.

지금까지 비극의 오름 내림과 흔히들 시련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결국은 운명이란 것으로 귀결되었다. 흔히들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단정하는 부류가 있다. 사실 이 말을 뜯어보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돈도 직위도 선출직의 자리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사고태도다. 그래서 끝까지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자만심에 빠졌고 겸허한 마음이 없는 교만한 사람이라고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주위 환경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이런 생각 태도는 자기는 하느라 하지만 나머지는 남의 탓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내 탓이라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소수의 성공한 사람의 사례를 표본으로 하여 교육에 활용하는 태도 교육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운명이란 것을 생각해 보았다. 운명의 새로운 정의는 자기 탓, 남의 탓 양 쪽 생각의 점유율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은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피조물인 우리는 자기 성실성을 꾸준히 연마하는 것이 좋은 삶이다. 그 결과에 집착해서 주위를 어둡게 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꾸준히 연마하라 그 결과는 나중 문제다, 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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