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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산문]김호성

나는 앞으로 갑(甲)으로 살 것이다

“어머~이게 아직까지 여기 있었네...”

옷장을 정리하던 아내가 세월의 때가 묻은 물건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한다. 아내가 꺼내든 비단첩 앞에서 나는 멀뚱멀뚱하기만 했다. 매듭을 풀고 꺼낸 화선지에 생년월일시가 또박또박 적혀있다. 달필로 쓴 행서체 두줄이 가물가물한 지난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四柱(사주)
辛丑八月十九日子時生(신축8월19일자시생)

함을 지고 온 때가 내 나이 스물일곱이던 1987년이었으니까 34년 전이다. 1961년 신축년 흰소의 해에 태어나 그로부터 60년이 지났으니, 비로소 나는 올해 환갑을 맞이한 것이다.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기다리던 때라니? 그렇다. 나는 이날을 기다려왔다. 진정한 갑의 시간이 내게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주팔자에 대해 지식도 관심도 없는 내게 아내의 비단첩 속 사주 발견은 퇴직 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내게 오랫동안 보지 못한 고향 마을 어귀 솟대 같은 발견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갑으로 태어난다. 산술적으로 환갑은 61세, 언어적으론 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환갑은 갑으로 태어난 내가 다시 갑이 된다는 의미이다. 맞다. 인간은 누구나 다 갑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만 60년 뒤 또 한차례 갑으로 거듭난다. 차이가 있다면 출생의 갑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뤄진 것인 반면 60년 뒤 찾아온 환갑의 갑은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는 시간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환갑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환갑 이후의 일상 속에서 자신이 갑의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잘 살았다는 반증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만약 갑이 아닌 을의 대우를 받는다면? 이 또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더욱 열심히 살라는 응원이다. 환갑 이후의 삶 속에서 갑의 시간, 을의 시간을 따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갑의 시간 속에서 함께 나누고, 을의 시간 속에서 더욱 열심히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61년에 태어나 70년대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80년대에 대학과 병역의무를 마친 뒤 원하는 직장에 입사했다. 이후 34년 동안 줄곧 한 분야 산업현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찾아온 퇴직과 함께 올해 환갑을 맞이했다. 마침내 진정한 갑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얏호!!

이제부터 나는 나의 의지가 개입되는 진정한 의미의 갑의 삶을 살고자 한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누군가의 요청을 받고, 누군가의 협력을 요구받았던 시간들에 익숙했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정작 내 스스로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실천하는 방식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바야흐로 환갑, 이제 비로소 진정한 나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갑 이후의 남은 삶 속에서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선 나는 지난 34년 동안 내가 쌓은 커리어를 바탕으로 ‘나눔의 삶’을 살고자 한다.

평생 한 우물을 제대로 팟다면 그 우물에 물이 넘쳐날 것이다. 넘치는 그 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눌 물이 없다면? 그것은 남의 탓이 아니다. 전적으로 내 탓이다. 우물을 잘못 판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생 1막 그다지 감동 없었다는 얘기다. 다행히 내겐 목마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물이 있음을 느낀다. 퇴직과 함께 직장 동료선후배들이 전해 준 메시지를 하나 둘 확인하며 나는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의 모래밭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사람들이 전해준 메시지의 내용들은 크게 네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감사, 응원, 건강, 행복.

의례적인 덕담일 수도 있겠으나 진정성이 전해지는 안부 메시지를 접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 역시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내 주변 사람들을 응원해준다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퇴직과 함께 후배들이 전해준 감사패에 적힌 문구를 다시 한번 음미해본다.

당신이 있어 늘 든든했습니다.
다가올 당신의 2막이 아름답기를 응원합니다.

후배들이 든든했다고 하니, 1막 인생 헛산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 지난 60년 동안 나를 지켜준 기둥은 태어난 생년월일시 사주라는 이름의 선천적 운명이 아니었다. 후천적 인연으로 만난 내 곁의 사람들이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부분적으로 불편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행복했던 인생 1막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그동안 함께한 사람들과 만들어갈 아름다운 2막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할 사람들은 최우선적으로 내 가족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가족들만큼 소중한 사람들 일 것이다. 모두가 나를 갑으로 환생시켜준 사람들이다.

이른 아침 아내와 함께 배수지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은 요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200여 차례 도전 끝 그 힘들다는 청년취업의 문을 통과한 아들의 출근길을 도와주는 것 또한 잔잔한 기쁨이다. 큰딸 아이 결혼 이후 갑으로 태어난 손녀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가는 날이면 내 마음은 어느새 국민학교 시절 소풍 전날 아침이 된다. 출근길 지하철 환승장에서처럼 바쁜 걸음은 아니지만 달팽이 마을에 사는 느림보처럼 나는 오늘도 내일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다. ‘마이 웨이’(My Way)를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묘비명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하지 않던가.

The best is yet to come.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환갑 이후 남은 생 앞에서 나는 바다를 처음 본 소년처럼 가슴이 뛰고 있다. 환갑,
갑으로 환생한 인생,
나는 앞으로 갑으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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