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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에게 쓰는 편지
나의 친구 B에게
지금 미얀마는 많이 덥지요? 한국은 이제 막 봄이 끝나고 여름에 접어드는 참입니다. 나는 어제 집 앞 과일가게에서 사 온 바나나를 먹으며 미얀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바나나가 햇살과 더위를 한껏 받고 자라 달콤하고 진한데 한국에서 팔리는 바나나는 너무 일찍 나무에서 땄는지 단맛이 덜하고 어딘지 허전합니다. 우리가 함께 먹었던 국수는 큰 가마솥에서 계속 끓여 퍼낼 때마다 진한 국물맛이 가슴 깊이 차올랐었지요. 한국에서 파는 쌀국수는 비싸기만 하고 깊은 맛이 부족합니다. 그 공허함을 과도한 조미료로 때우려는 흔적이 못내 섭섭합니다. 그런 작은 서운함을 만날 때마다 나는 미얀마가 몹시 그립습니다.
평생을 일한 방송사에서 은퇴를 하고 미얀마 국영방송에 1년간 자문관으로 갔던 일은 내 커리어에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모든 환경이 열악했지만 당신들은 아무것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내 서툰 영어로 진행되는 세미나에 귀기울여주었고, 88올림픽 이후 2002 월드컵을 거쳐 한국이 밟아간 발전의 길을 궁금해하며 질문해 주었습니다. 디지털 장비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아날로그에서 모바일 환경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웃어주었습니다.
그 웃음이 늘 고마웠습니다. 자료는 부족하고 강의는 어설펐지만 청중의 빛나는 눈을 생각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열심히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중계차를 타고 생방송을 준비하는 시간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첨단 장비로 넘어간 한국과는 달리 아직 옛날 장비를 쓰는 미얀마에서는 나이든 사람의 지식이 필요한 순간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조각난 지혜조차 받아들여주는 미얀마 친구들이 있어 흘러간 옛 노래 같은 내 삶이 살아 움직이는 생방송의 일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나라에서 나는 방송에 대한 약간의 지식 외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늙은이였습니다. 잠깐의 자문 외에는 어린애처럼 서툴기만 한 내게 미얀마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인사말을 가르쳐주고, 음식을 주문해주고, 시장에 데려가 주었습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사회생활을 다시 배웠습니다. 내가 쩔쩔맬 때마다 나타나 도와주는 느긋하고 상냥한 선생님이 어디에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부처가 어디에나 있다고 했지요. 내게는 미얀마 사람이 모두 부처였습니다.
특히 B 당신은 아주 훌륭한 길잡이였습니다. 우리는 서른 살쯤 차이가 나지만 당신은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었지요.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에서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요. 당신은 장인어른 앞에서 나를 ‘My Korean frined’라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당신의 처부모님은 내게 당신이 우리 사위의 친구라면 우리의 친구라고 다정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순간이 내게 얼마나 큰 자유로움과 기쁨을 주었는지 당신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젊고 활기찬 친구들을 얻었기에 나의 미얀마 생활은 아주 행복했습니다. 결혼식에서 큰 가마솥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춤을 추었고 친구들의 시골집에 초대받아 가기도 했습니다. 어디 다니는 누구라는 간판을 떼고 한국인 친구 미스터 문이라는 명찰을 달자 몸이 아주 가벼웠습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의식해야 할 권위도 없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와 친절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한국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한국을 욕먹이지 않기 위해 평생 사랑하던 술을 끊었습니다. 착하고 고운 이들 앞에서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요.
후진국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이 미얀마에서 배울 점은 아주 많았습니다. 방송국 어린이집에서는 정식 직원의 자녀와 운전기사의 자녀가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았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놀던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만나러 올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 품에 안겨 실컷 응석을 부린 뒤 퇴근을 기다렸습니다. 작고 통통한 손이 내 책상 위로 올라와 장난을 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사랑스런 광경이 업무 효율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 딸이 아이를 낳고 보니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을 존중하는 미얀마의 문화가 참 좋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부가 생활화된 것도 참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크든 작든 내 것을 남과 나누는 일이 숨쉬듯 자연스러웠습니다. 식당 앞에는 늘 가난한 이들이 있었고 계산하고 남은 잔돈은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아 일반인들도 1년에 며칠간은 출가를 하여 수행을 한다는 것도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삶에 쉼표를 넣을 여유가 있기에 바쁜 삶에, 출세에, 성공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나는 소위 엘리트라는 이들이 많은 직장에서 평생을 보냈기에 탄탄한 성공가도가 사람의 마음을 파먹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얀마의 소식을 뉴스에서 자주 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고 꽃 같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지요. 인터넷을 통해 그곳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영상을 볼 때마다 가슴을 졸입니다. 혹시 아는 얼굴을 보게 될까봐 손을 떨면서도 당신 나라의 소식을 챙겨 보게 됩니다. 볼 때마다 내가 아는 이들이 상처입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올곧은 심성의 젊은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걱정이 됩니다. 신께서 맑고 반듯한 당신을 지켜주시리라 믿지만 늙은이의 노파심에 차마 염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내가 떠나는 날 당신은 나를 배웅하며 우리도 꼭 한국처럼 풍요롭고 부강해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이 내 나이가 될 때 쯤이면 미얀마는 한국보다 더 휼륭한 나라가 되어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미래를 보고, 나는 당신에게서 희망을 본다고 했지요. 미얀마 젊은이들이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젊고 용감하고 지혜롭기에 이 시련을 잘 이겨낼 것입니다.
당신의 30년 뒤는 지금의 나보다 더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부디 건강하기를, 안녕 나의 친구여.
당신의 앞길을 축복합니다. 밍글라바. 밍글라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