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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공모전
보고 또 보고~ 또 가봐도
오래된 사진들을 정리하다 갑자기‘헉!’숨이 목구멍에 걸려 버렸다.‘내가 여기를 갔다왔었네 ?! 그것도 모르고 최근에 또 간거야 ?’완도 드라마세트장, 아산만 평택호, 순천 갈대밭, 송산 공룡알화석지 등등... 찾다보니 것도 한두군데가 아니였다. 여러분들도 예전 사진이나 기록을 한번 찾아보시라. 단언하건데 긴가민가한 데자뷰(Deja vu)정도가 아니라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때와 장소를 발견하는 황당한 경험을 할 것이다.
나의 인생목표는 죽기전까지 대한민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 없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 밟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한번 간 곳은 다시 안 가고 더 멀더라도 가고 오는 길을 다른 코스로 잡았다. 애로사항도 생겼다. 가까운 곳은 거의 다 가봐서 새로운 것을 찾아 충청도를 넘어 전라,경상도까지 하루에 완주할 정도로 도(道)를 넘는 지경에 이르자 도로 통행료와 기름값에 질린 아내가“ 사우디 왕자 납셨네~ ”라고 비아냥대도 대꾸 하나 못하고 살아야했다. 그런 내가 한번 간 곳을 또 갔다는 건 만수르가 주유할인카드 내미는 모냥새인 것이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간 건 분명히 기억하는데 안 간 것 같은 느낌, 낯선 기분. 나에겐 터키 이스탄불이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다. 떠나기 전 마음속에 그렸던 이스탄불은 노란 터번을 두른 신밧드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양파같이 생긴 황금모스크 지붕사이를 날라 다니는 곳이었는데 이스탄불에 도착해 내 안구에 비친 실제 모습은 글로벌 체인 호텔인 이비스에서 유럽백인처럼 생긴 터키이슬람 청년이 비싼 최신형 미국 사과폰으로 통화하는 광경이였다. 물리적인 장소와 문화적인 장소간의 정체성 혼란,미리 학습된 과거와 변해버린 현재 사이의 간극이 몇 년이 지나도 좁혀지지 않아 이스탄불을 떠올리려면 하드디스크 버벅대는 소리가 두개골 속에서 들리는 듯 했다.
왜 기억을 못했지 ? 왜 기억이 일치하지 않지 ? 너무 오래되서 자연스럽게 잊은 거라고 자위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아 가만히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일단 먼저 눈에 띄는 건, 동행이 달랐다. 같은 장소인데 아내랑만 갔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갔거나 아이들과 같이 간 차이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 사진속 옷차림을 보니 계절이 달랐다. 한여름 땡볕에 가서 고생한 경우도 있었고 찬바람이 불어 두꺼운 옷을 입고 찍은 때도 있었다. 가서 뭘 했는지도 큰 차이가 있었다. 평택호에선 아내랑 각자 산책을 했는데 아이들이랑 간 사진속에선 가오리연을 날리고 있었다.
순천만에선 아이들과 전망대에 올라가 유리창 너머로 갈대밭을 내려다 봤고 실내전시물을 구경했는데 최근 갔을땐 갈대습지 갯벌에서 칠게와 짱뚱어를 만났다. 마지막으로는 상상과 실제가 너무 차이 나는 경우다. 안동이‘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홍보해서 평소 선비, 양반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안동시내 들어서자마자 거리에서 화끈하게 육박전을 벌이는 두 운전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한 차이점들이 내 기억을 망각,왜곡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기억이 왜곡되거나 망각되는 것이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 사진기법 중 아웃포커싱이라는 것이 있다. 목표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풍경을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찍는 것이다. 여행의 추억이 행복하려면 기분 나빴던 기억은 사소한 것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나이아가라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스테이크의 맛을 기억하려는데 식당 화장실 변기안에 타인의 흔적이 불쑥 떠올라 참 난감했다. 현대는 기억력이 좋은 것도 질병이 되는 시대라는 주장에 공감이 간다.
그럼 기억의 왜곡과 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해 볼 순 없을까 ? 내 인생목표를 달성하긴 불가능하다는 걸 사실 안다. 세상은 넓고 볼거리는 무궁무진해 사우디왕자가 돼도, 만수르라도 별수 없다. 난 더더구나 남은 시간도 그럴 돈도 없다. 공모전 상금이라도 받으면 모를까. 호구지책, 한 곳을 찍어 매번 다른 방법으로 가본다면 돈도 적게 들고 질리지도 않게 평생 여행하는 기분을 낼 수 있지 않을까 ? 낮에 갔으면 새벽에도 가보고 봄에 갔으면 가을에도 가보고 친구랑도 가보고 혼자도 가보고 자전거도 타보고 벤치에 누워 낮잠도 자보고... 정신 못 차리게 바꿔서 내 뇌를 한번 속여보자. 아내가 또 가고 싶다는데도 짐짓 못 들은척했던 천리포 수목원을 갑자기 도전해 보고 싶어진다.
이것은 서비스, 평생 사랑만하며 사는 방법도 있다는 거. 나이 들었다는 말이 듣기 싫어 아내랑 대화할 때는 나이라는 단어를 그때그때 과일 이름으로 바꿔 부르자했다.‘ 수박을 드니 무릎이 아프네’‘넌 어찌 체리를 먹을수록 더 예뻐지니’등등... 젊었을 때는 그나마 나르시시즘으로 버텼는데 고구마(나이)를 먹을수록 내 눈에도 비호감이라 거울조차 안 보게 된다. 외모에 자신감이 없어지니 자연적으로 이성에게 무관심해지고‘사랑’이란 단어는 내 회화사전에서 점점 소멸되어 갔다.
그런 내가 요즘 새롭게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심심하면 놀아달라고 톡톡 ! 내 등 뒤를 두드리고 밤마다 내 팔을 꼬옥 껴안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뽀뽀해달라고 주둥이를 들이댄다, 맞다, 내 52번째 생일날 아들이 준 선물이라‘오이’라는 이름표를 단 고양이다. 오이를 위해선 사람이 먹는 과자보다 더 비싼 간식을 주저없이 주문하는 내 변한 모습에 스스로도 놀란다. 주변을 둘러보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은근 많다. 마당에 핀 수국을 사랑하고 어항속 물고기와 사랑에 빠지고 사료 얻어먹으러 가끔 들르는 들고양이랑도 사랑을 나눈다면 평생 사랑만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얘네들은 사랑이 식지도 배신하지도 않는다는 거. 남들보다 두 배 더 살고 매번 새로운 곳을 여행한들 무슨 재미가 있을까 ? 사랑이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