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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문예 공모전

[장려상 - 산문]오미향

다시 연극 무대에 오르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 일도 안 하셨다는 말인지요?”

“예, 저의 시대에는 직업이 필수는 아닌 선택이었고 저는 가정과 육아를 선택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면접관이 원하는 주제는 커녕 사지死地로 떨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 이번에도 글렀구나. 언제면 시계추는 내 편으로 큰 원을 그리며 맑은소리로 울릴까.

세상은 끊임없이 내게 질문하고 질문했다. 대학을 나오고 왜 쉬었냐고. 사회 경험이 전무하냐고. 직장생활, 조직경험은 없냐고. 머리와 끝만 남고 몸통 대부분이 텅 비어버린 연체동물마냥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면접 보면서 알았다. 그동안 가슴이 충만하고 감성은 무르익었으며 행복은 그다지 멀리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유 모를 분개감과 수치심으로 바르르 떨렸다.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고 어디서부터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야 하나 한숨부터 나왔다.

“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얘들을 가르치겠다고? 집에 있는 얘들이나 잘 가르쳐보지그래?”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의 능력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무심하게 남편은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얘기했다. 이래 봬도 과외 선생 경력도 있었던 난데 결혼과 육아로 공백이 커도 너무나 커져 버렸다.

어지간히 내 속을 태웠던 둘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여자 나이 서른 이전에 낳은 자식은 엄마의 젊은 기를 받아 똑똑할 확률이 많다고 하는 근거 없는 낭설에 속았다. 이른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던 시기에 태어난 아들은 나면서부터 병치레가 심했다. 감기를 노상 달고 살았다. 감기 후유증으로 중이염, 폐렴을 앓았고 일시적인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큰 병으로 종합병원을 들락거렸다. 입원과 통원 치료, 동네 소아과를 비롯해 안 가본 병원이 없을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될 무렵 오전 내내 학교에서 맡아서 책임져준다고 하니 집에만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뭐래도 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얘들을 최소한 두 명을 낳았고 딸만 둘인 엄마는 뒤늦게 셋째를 낳는 게 유행이라면 유행이었다. 집집마다 얘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동네를 지나다 보면 유모차, 자전거 행렬을 만나기가 일쑤였다.

친구의 소개로 영어 학습지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침 시간을 이용해 영어 테이프 들은 내용을 전화로 선생님이 물어봐 주고 간단히 체크 하는 방식이었다. 가성비가 좋아서 그런지 꽤나 유행했었다. 가가호호 집을 방문하여 정해진 시간에 얘들을 가르치는 학습 방법이었다. 나름 젊어 보였고 학습 감각도 뛰어났으며 어머니에 대한 예의와 관리가 부드러워서 그런지 내가 속한 지사에서 탑을 달릴 정도로 일을 잘하였다. 어느 날 남편이 이왕 하는 거 좀 더 해서 지사 하나를 운영해보라고 권유했다. 사무실 운영자금은 지원해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아, 인생은 참 얄밉다. 기회가 왔는데 잡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항상 젊을 것 같았고 언제든 내가 원하면 이정도 관리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었다. 별다른 인생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내가 낳은 보물 1호, 2호가 잘 자라주는 것만이 나의 원대한 인생 목표였다. 두 아이를 돌보는 틈틈이 남는 시간을 이 정도 일자리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나만의 착각 인 것이었다. 그 정도 시야밖에 가지지 못했던 거다. 알바로 점철된 나의 짧은 직업 이력은 여기서 마무리됐다.

갑작스런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어디서부터 마음을 추스르고 정리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남편만 믿고 살아온 세월이 야속했다. 전조가 있었을 터인데 혼자 묵묵히 버텨왔을 남편을 생각하니 원망도 잠시,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일단은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집을 옮겼다.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무기가 필요했다. 육체로 먹고 살기에는 그래도 젊다고 느껴서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직업을 구하는 사이트가 많았다. 그 중에서 고용노동부 워크넷에서 나 같은 중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어 신청했다. 상담을 받고서 비교적 내 나이와 환경에 어울릴 것 같은 직업상담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심리학이라는 과목은 적성에 잘 맞았고 재미있었다. 직업에 대한 탐색과 발전과정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문제는 컴퓨터 실력이었다. 젊은 사람하고 경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하고 직업상담 자체가 모든 것을 전산으로 처리해야 해서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어야 했다. 하나씩 둘씩, 자판을 익히고 검색을 하고 엑셀에 도전을 했다. 배우는 기쁨은 컸으나 익숙함이나 숙련도에서는 기준 이하였다. 두 가지를 같이 배워서 직업상담사 자격증은 한 번에 취득했다.

용기를 내서 관공서 위주로 단기계약직에 도전했다. 처음 출발은 순조로웠다. 1년간의 계약이 끝나고 완전 초보 딱지를 떼고 나니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육아휴직 대체인력, 3개월 단기계약직 등 경험을 쌓기 위해 가리지 않고 이력서를 넣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굉장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알바 개념으로 단순한 직종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다는데 사회는 냉정했다. 나이 듦이 나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준비를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서류에서는 항상 통과였다. 한 사람을 뽑는데 최소 10명의 면접이 시작되었다. 둘러보니 내가 항상 연장자. 긍정적인 태도로 면접을 잘 볼 자신은 있으나 전산 자격증이 없는 게 흠이었다. 이 나이에 컴퓨터를 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사무 능력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원자가 넘치다 보니 자격증은 필수요 젊음은 선택의 지름길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세상이 나를 필요로 안 한다면 내가 접겠어. 집으로 돌아가겠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살짝 고였다. 길바닥에 나 뒹구는 낙엽들이 흡사 내가 뿌린 이력서처럼 바닥에 아프게 나뒹굴고 있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남들이 밟고 갔다. 내 이름 석 자가 땅에 떨어져 밟히는 아픔은 또 한 번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주 5일 9시부터 1시까지 4시간씩 배웠다. 제일 일찍 가서 한글 타자를 연습하고 수업이 끝나면 문을 나서는 선생님을 붙들고 질문을 했다. 한 달이 안 돼서 ITQ 한글엑셀 자격증과 컴퓨터활용능력 2급을 땄다. 국가공인 자격증이 세 개나 됐다.(운전면허 포함)

젊은 날의 후회와 회한은 생각할수록 독이 됐다. 이제는 다 잊어버리자. 내가 뭘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뭐고 그 목표를 향해 어떤 노력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직업 경험이 없던 내가 직업을 구하고자 하는 내담자를 심리 상담하고 필요하면 직업훈련을 연계해주고 직업을 알선하고 구직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과정을 내 손으로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구직자를 1년 정도에 걸쳐 책임지고 직업이라는 길을 안내하고 같이 가주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 보람도 있었고 내담자로부터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내가 아쉽고 힘들 때 길잡이가 돼 주는 멘토가 있었으면 간절히 바랐던 그 마음이 있었기에 직업 상담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인생 2막을 준비할 때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제 할 일을 다 하다가 이제 아름다운 은퇴를 앞두고 사람들은 또 한 번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인생이라는 긴 연극에서 주인공도 해 봤을 테고 조연이 되어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나처럼 평생 엑스트라로 지냈을 수도 있다.

관객이 되어 때로는 분노하고 눈물 흘리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함께 공감했을 것이다. 이제 당당히 무대에서 내려와 또 다른 연극을 준비한다. 이번에는 남과 경쟁하고 삶을 책임져야 하는 무대가 아니라 자신의 연륜과 사회 경험을 살려 인생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구성할 것이다.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 눈을 돌리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달려갔다. 삶에 지쳐 미뤄뒀던 공부나 취미활동, 운동도 해 오고 있다.

나만의 무대를 어떻게 꾸밀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어떠한 무대를 꾸미고 어떤 내용으로 연극을 만들 것 인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가족의 응원과 함께 나만의 아름다운 인생 2막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신중년 미래 설계를 위한 무료 직업상담을 위해 50+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상쾌하고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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