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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문예 공모전

[장려상 - 단편소설]허정애

내 생의 이모작

박 여사는 스카프를 두르고 밤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도심 변두리에는 저녁이 야단스럽다. 단칸방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엄마는 밥상을 차리고 아빠는 TV를 본다. 그렇게 똑같은 저녁이 간다. 그렇게 사각형의 각진 저녁이, 모서리가 있는 저녁이 간다. 매양 둥글지 못해 가끔 큰 소리가 날 때도 있지만 어느 새 세월 앞에 서로의 모서리는 닮아 있다.

달빛이 흐뭇하다. 박 여사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가끔 기침을 할 때마다 오줌을 지려 황망한 박 여사는 꼭 기저귀 팬티를 입고 외출한다.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이 두텁고 은밀한 이 기저귀 팬티이다. 한 목숨이 저물어간다는 것의 신호일까, 박 여사는 우울하다. 새로 얻은 필리핀 며느리는 아주버님 댁 며느리만큼 예쁘지 않다. 박 여사의 며느리는 피부가 오디만큼 새까맣고 웃을 때 잇몸이 너무 많이 보였다. 당나귀를 닮은 듯 했다. 아들은 어쩌자고 저런 화상을 데리고 왔을까, 저걸 눈이라고 달고 다닐까? 박 여사는 또 뿔이 났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박 여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농촌 총각은 이제 필리핀에서도 결혼을 꺼려한다고 해서 멀쩡한 시골집을 놔두고 감행한 이사였다. 방 1칸을 얻어서 소꿉장난하듯 차린 살림이었다. 창문을 열면 옆집의 창문이 있고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서로 문을 열지 않는 것이 피차간 예의였다.

박 여사는 방안 가득 바람이 불어오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어놓는 것도 세상에 대고 빈한한 살림을 내보이는 것 같아, 박 여사는 그것도 곧 포기하고 말았다. 지붕을 타고 내리던 소슬바람이, 배롱나무를 간질여 대던 산들 바람이 박 여사는 그립다.

달덩이 같은 손주 하나 만들어보라고 일부러 방을 비껴주고 나온 길이었다.

밖에 더 있으라고 이슬비가 돋나? 박 여사는 비밀번호가 없는 어느 원룸 현관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도시 인심은 무서웠다. 화장실 한 번 쓰고 싶어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 사는 곳을 닮아간다고 이 사각형에 갇혀 사니, 마음도 사각형을 닮아 가는 거라고 박 여사는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이 선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감춰 두었던 행복처럼 갑자기 떠올랐다. 게이트볼 장에 가면 이 선생을 볼 수 있었다. 수요일 저녁과 금요일 아침이면 이 선생은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살아서 그렇게 말끔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옷도 점잖게 입고, 말씨도 고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것이 박 여사의 마음에 살짝 스크래치를 내었지만, 이 선생은 박 여사에게 우연히 주운 일기장 같은 사람이었다.

이 선생의 어깨는 평생 책상위에서 일을 한 사람의 어깨였다. 어깨선은 8부 능선을 닮아 부드럽고 편안하게 떨어져 내렸다. 박 여사는 이 선생에게 바나나 우유를 사고 싶었지만, 따로 사 줄 수는 없어서 10명 전체에게 바나나 우유를 사서 돌렸다. 속이 쓰렸지만 어쩌겠는가, 속 보이는 짓을 하다가 망신당하느니 돈을 손해 보는 편이 나았다. 이가 다 빠진 노인네 한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걸 박 여사는 그냥 웃었다. 그리곤 속으로 그 노인네를 욕했다.

‘아니, 그 많은 연세에 게이트볼은 무슨?”

박 여사의 얼굴은 너무 억지미소를 짓는 바람에 입술 끝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박 여사는 입술 끝을 비비며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선생이 우유를 마시고 나서 빈 우유 통을 딸랑딸랑 흔들며 박 여사를 바라보았을 때, 박 여사는 그저 칠푼이처럼 웃기만 했었다. 박 여사는 시골에 돌아가서도 저 눈부신 웃음만큼은 잊히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모기가 떼를 지어 문다. 도심의 모기는 성정이 사납다. 박 여사는 얼추 세 시간 정도를 밖에 있었던 것 같다. 슬슬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집은 높이 올라갈수록 집값이 싸다고 한다. 아무렴. 한 번 내려오면 올라가기는 얼마나 힘든데. 수박이라도 한 통 사서 올라갈라치면 저승 가는 길이 그리 멀고 힘들까. 여름이면 모두 구도자처럼 이글거리는 해를 등지고 묵묵히 집을 향해 비스듬한 오르막길을 걸었다. 그에 비하자면 시골의 집은 얼마나 유순한가. 대문 열어 놓고 안팎으로 창을 열면 바람은 사통팔달 안 닿는 곳이 없었다. 뒤란에는 호박잎이 넌출거리고 하얀 감자 꽃이 바람에 날려 그것만 보아도 눈부셨다. 맷돌이 놓인 마당가, 그리고 방 3칸의 너와나무 집.

박 여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대문 옆에 붙은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이라고 부르기에도 옹색한 방이 나온다. 부엌 1칸, 방 1칸인 구소련 수용소 같은 집이 나온다.

“웅아, 엄마다. 들어가도 되냐?”

“예. 엄마. 들어오세요.”

마리아가 방문을 열었다. 박 여사는 기함을 할 뻔 했다. 아들이 팬티만 입고 오른쪽 다리를 다 내놓고 있었다. 시간이 가도 그놈의 징그러운 화상 흉터는 없어지지 않았다. 무엇에 쥐어뜯긴 듯한, 밀가루 반죽을 해서 억지로 붙인 듯 한 오른쪽 다리를 들고 아들은 묻고 있었다.

“이 봐, 필리핀, 자세히 봐. 이래도 내가 좋아? 거짓말 하지 말고 말해봐. 너 한국말 잘 하대. 내 생각엔 말이야, 너는 전에도 한국 남자랑 결혼한 적이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한국말을 잘 하는 게 아니냐고?”

“아저씨. 그건 정말 아니에요. 나도 알아요. 내가 안 예쁜 거. 그래서 말이라도 잘하고 싶어서 한국 성당을 6년 동안 다니면서 한국말을 배웠어요. 한글도 깨쳤어요. 당신의 다리는 나에겐 아무 상관없어요. 그것은 당신의 일부분이지 당신 전체는 아니니까요.”

“잘 들어 봐. 우리는 너를 속였어. 농촌이라고 하면 결혼을 기피한다고 해서 시골의 너른 집 놔두고 이 동물원 우리 같은 집을 따로 구한거야. 넌 속은 거라고. 알았어?”

“그래도 나는 신께 감사해요. 나를 술집이나 섬에다 팔아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우선 감사하구요, 당신이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인 것이 감사하구요, 어머님이 좋으신 분인 것이 감사합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래. 바보 아냐?”

아들은 츄리닝 바지를 다시 입고 밤마실을 나갔다. 이번엔 아들 차례였다.

좁은 방에 살면 정신이 기개를 잃고 자꾸 쩨쩨해져 가는 것 같다. 시골집에서라면 그냥 넘어 갈 일도 자꾸 따지러드는 박 여사는 스스로에게 가끔 놀란다.

주방 창문으로 달빛이 환하다. 박 여사는 함초롬 달빛에 젖는다. 무슨 위로처럼 이 선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되, 허용한 거리만큼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그의 철벽 두른 방어가 새삼 슬프다.

어느 날인가, 박 여사는 삼계탕을 이고 들고 게이트볼 장으로 간 적이 있었다. 땀이 몽글몽글 온 몸에서 피어났다. 그러나 이 선생을 먹일 생각을 하니 걸음이 빨라지고 괜스레 엉덩이는 실룩거렸다. 입구에서 옆집 발발이 새끼를 보았으나 왼쪽 발로 싸악 밀어버렸다. 박 여사는 마음이 급했다. 실내 게이트 장 문을 열자, 고만한 멤버들이 벌써 다 모여 있었다. 셋트 스코어 3:1이면 다 끝난 게임이었다. 박 여사는 다용도실에 들어가 삼계탕을 차렸다. 아니, 삼계탕 말고는 셋팅을 다 해 놓았다. 오는 순서대로 삼계탕을 떠 준다면 이 선생 삼계탕은 제일 연하고 좋은 부위를 먹일 수 있으리라. 왁자지껄하게 게이트볼 팀이 들어와 탄복을 한다. 박 여사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들어오는 순서대로 삼계탕을 뜬다. 이 선생은 네 번째 입장이다. 제일 안쪽의 찹쌀과 부드러운 속살을 가려서 담는다. 수삼도 하나 넣었다. 이 선생은 웃으면서 “고맙습니다, 박 여사님.” 하더니 자신의 삼계탕을 뒤에 있던 선배에게 권했다.

“선배님, 어서 드세요. 기운이 펄펄 나실 겁니다.”

박 여사는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이 선생의 삼계탕을 떴다. 수수하고 퍽퍽한 바깥 살과 찹쌀 조금 그리고 대추를 떴다.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박 여사는 10인분의 삼계탕을 다 펐다. 그리고 조용히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이 선생은 자신의 마음을 다 알면서도 끝까지 모르는 척 하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박 여사는 생각했다. 자기를 좋아하게 해 놓고선 모르는 척 은근히 그것을 즐기는 야비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집엔 마침 며느리가 없었다. 박 여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꺼억꺼억 울었다. 남사스러워서 어디다 대고 말할 수도 없었다. 며칠 전 지하상가를 지나며 샀던 립스틱을 꺼내 보았다. 이젠 그 고운 빛깔도 아무 의미가 없다. 하얀색 블라우스도 입을 일이 없다. 일 년 열두 달 온몸에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이 하얀색 블라우스가 닿기나 하겠는가.

며느리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천 냥 가게 쇼핑백이 들려있다. 며느리는 웃으면서 물건을 하나하나 꺼낸다. 술주정뱅이 모양을 한 장식품(이걸 도대체 왜 사왔을까,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을까?) 머리핀, 습기 먹는 하마, 형광 주홍색 가짜 꽃 등이었다.

“앞으로 쇼핑은 나랑 같이 가자. 네가 아직 서툴러서 시장 볼 줄을 잘 몰라.”

“어머니. 그런데 우리 언제 시골 들어가요?”

마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박 여사는 들고 있던 물 잔을 쏟을 만큼 놀랬으나 대답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응. 이 달 방세는 냈는데 1주일 밖에 안 돼서 지금 나가도 뭐라 안 해. 보증금 없이 비싸게 얻었거든. 그동안 속여서 미안하다.”

마리아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장판의 꽃무늬 모양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심심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속인 박 여사에게 이 결혼은 무효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박 여사는 마리아의 속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번만이라도 새벽에, 그 푸르른 달빛 속에 초가지붕위의 박 넝쿨을 본다면, 그곳을 떠날 수 없으리라.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이른 새벽의 색감을 본 사람이면 절대로 그 곳을 싫다고 하지 않으리라. 박 여사는 한 때, 이 선생에게 그 푸른 새벽달과 달빛에 흠뻑 젖은 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선생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니, 애초에 박 여사가 넘보기엔 너무도 과분한 사람이었다. 박 여사는 마음을 다 잡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마리아. 립스틱 하나 줄까?”

“무슨 색깔인데요?”

“빨간색. 네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지? 마리아,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들어 다오. 내가, 속으로만 좋아했던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보고 난 후에는 골목을 지날 때도, 게이트볼 장을 지날 때도 내 눈은 늘 그 사람을 찾았지.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립스틱을 샀다. 너희 사촌 형님이 신혼여행 갔다가 사다 준 립스틱도 그대로 있는데, 나는 빨간색 립스틱을 사고 싶었어. 그 사람은 내가 중성인 아줌마가 아니라 여자이고 싶게 했어. 어느 순간에도 어디에서도 내가 억척 아줌마가 아니라, 여성적인 것을 무기로 삼고 싶게 만드는, 왜 있잖아, 청순가련형. 너 알아듣니?”

“그런데 어머니. 그런 연애를 왜 하세요? 내가 나일 수 없는데, 모든 행동과 생각을 온통 그 사람에게 맞춰야 하는데 어머니의 고유성(固有性)은 어디로 간 걸까요? 저는 씩씩한 어머니가 좋아요. 바퀴벌레를 한 손으로 때려잡고 주인집에 수도세가 많다고 항의하는 어머니가 더 좋아요.”

마리아는 단호했다.

“어머니는 어머니 자체로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랑은 하지 마세요.”

박 여사는 눈물을 보였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어쩌지 못했다.

“마리아, 내일 게이트볼 장에 가면 그를 볼 수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를 보고 싶어. 네가 따라 가주면 좋겠는데.”

“어머니. 가요. 같이 가요. 우선 어머니 입을 옷부터 골라요.”

마리아의 추천대로 박 여사는 물빛 투피스를 입었다. 그새 도시 생활 하면서 살이 쪘는지 호크를 안쪽으로 옮겨 달았다. 마리아의 분홍색 립스틱도 발랐다. 날아갈 듯 화사한 옷차림으로 박 여사는 콧노래도 불렀다. 그날 밤 박 여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혼자 옥상에 올라가 서성이기도 했다. 사랑은 이렇게 한밤중에도 잠이 깨여 밤늦도록 옥상 위를 거닐게 하는 그런 것일까, 박 여사는 오래 전에 잊었던 설렘을 다시 떠올리며 한껏 들떠 있었다. 밤새도록 박 여사는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며 천국과 현실 사이를 오갔다.

멀리서, 게이트볼 장의 둥근 천정이 보이자 박 여사는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 우황청심환이라도 사올까요?”

“그래, 그것이 좋겠다. 솔밭 앞에 바로 약국이 있어. 삼천 원짜리 하고 오천 원짜리가 있는데 삼천 원짜리로 사 와.”

박 여사는 타는 입술을 옴팍 거리며 말했다.

“아니 이러지 마시라구요.”

게이트볼 장 안에서는 가냘픈 여자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까만 얼굴의 외국인 여자가 커피잔을 챙기며 남자들이 하는 수작을 어떻게든 피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블라우스는 이미 앞섶이 풀려 너덜거리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이 선생이 더 노골적이었다.

박 여사는 달려가 남자들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여자의 보온병과 커피 잔을 보자기에 싸서 들려 보냈다.

“이 사람들아. 당신들은 저만한 딸도 없어? 저만한 며느리도 없어? 어디서 아침부터 더러운 수작질이야?”

“아, 다방 레지 좀 만지는 것 갖고 뭘 대수라고 아침부터.”

“본인이 싫다고 하잖아.”

“그럼 다방 레지를 하지 말았어야지.”

어느 새 우황청심환을 사들고 온 마리아가 말했다.

“여자는 다 자기 몸의 결정권이 있어요. 내가 싫으면 싫은 거예요. 저 여자 분이 다방에서 계약을 할 때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커피를 갖다 주는 노동만 하는 거지, 어디 가서 희롱당해도 된다는 것은 적혀있지 않아요. 내 몸의 결정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절대 인권이라구요.”

“저 고릴라가 뭐래? 어디서 바나나나 골라 처먹고 있을 게 어디 와서 훈계 질이야? 야 너는 만져 줄래도 너무 못생겨서 내가 싫어.”

이 선생이 장갑을 벗어 손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순간 박 여사의 손이 이 선생의 뒷머리를 가격했다.

“실컷 때릴 테니까 견적 내서 나를 고소하시오.”

박 여사는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어서 이 선생의 이마를 향했으나 이 선생은 저 멀리 달아났다.

박 여사는 한 때, 이 선생이랑 잘 되어서 새 가족이 생기고 명절 때마다 제사상을 차리는 꿈도 꾸어 보았다. 신사 같은 그의 매너에 반해, 식당에서도 박 여사는 밥을 조금만 먹고, 좋아하는 멸치볶음이 나와도 아예 손도 대지 않았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도록 오해한다는 말이 아닐까, 박 여사는 마리아를 통해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루한 사람이었던가를 똑똑히 깨달았다. 인생 이모작이라는 것이 고작 새 남자에게 시집 잘 가서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그 집안의 제사를 지내고, 홈웨어를 갖춰 입고 안주인 노릇을 하고, 주말이면 정원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상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신데렐라 같은 환상이었는지를, 얼마나 주책없는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박 여사와 마리아는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옜다. 네 여권.”

마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물었다.

“그 반대. 우리가 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는 말이야.

보아하니 너는 필리핀에서 대학도 나왔다 하니 내 아들놈이랑 나랑 무슨 대화가 통하겠니?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냥 도망가라. 인생은 길다.”

“여기서 도망가면 저는 평생 도망만 다니며 살 거예요. 여권, 어머니가 가지고 계세요. 시골가면 제가 일을 못해서 정말 도망갈 지도 몰라요.”

오랜만에 보는 동네는 바람조차 눈에 익었다. 박 여사는 짐을 풀다말고 마을 회관에 호출되어 갔다. 마을에 하나 있는 초등학교를 폐교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라고 했다. 단 6명의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폐교하느냐 존치하느냐가 핵심안건이라고 했다. 박 여사는 태어날 손주를 생각해 존치로 마음을 정했다.

외국인 며느리들의 손주는 까맣고 곱슬머리여서 놀림을 당할 것이 뻔했다.

“인생 이모작”이라 했다. 끝없이 궤도를 돌아야 하는 경쟁이 싫어서 귀농했다는 사람, 책 한 권을 읽고 감동해서 농사지으러 들어왔다는 사람, 어르신들은 혀도 구부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가진 젊은 귀농인 들은 학교의 존치를 주장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라는 이름을 박 여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물 공기 햇빛처럼 교육도 공공재 이어야 합니다.”

이 말에 반해서 박 여사는 수첩에다가 몇 번을 옮겨 적었다.

“아니오. 그건 법인격부터 잘못 되었소. 자유재와 교육 자본을 같은 법인격으로 볼 수는 없소.”

교감선생님이었다. 박 여사는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회관을 나섰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검은 나무는 내장을 비우듯 바람에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다. 거기 마리아가 서 있었다. 마리아가 웃음과 함께 뒤로 감췄던 손을 내밀었다. 개망초였다. 어디든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 천덕꾸러기로 자라도 기죽지 않고 기어이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꽃이다. 생각하면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단 하루도 없었다. 햇빛도 바람도 구름도 다 조금씩 자리를 옮겨 잡았다.

인생 이모작이 별 거 있간디, 식구들 무탈하고, 젊어서부터 모운 적금 깨서 집도 수리해가며 살아가는 동안, 손주도 보고 나도 늙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던 날들이 나중에 죽음을 앞두고 보면 진짜 기적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윤이 나지 않아도 빛이 나지 않아도 수건을 머리에 쓰고 밭일을 하던 그 날 하루는 어제의 또 다른 이모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바람이 분다. 오늘 바람은 차다. 동전 하나도 안 틀리는 도회사람들의 계산처럼 차다. 그래도 우리 마을에는 좋은 날 다 보낸 늙은 퇴기의 치마 자락 같은 바람이 부는데, 쓸데없이 치마 밑단은 넓게 퍼져서 사람들의 말소리도 다 훔쳐내고 노인네 한숨소리도 다 덮어주는데, 귀 먹어가고 눈 멀어가는 빈 집의 노인만이 죽음도 은혜인 생의 마지막 비밀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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