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 빌딩 속
전통시장 생존법
영동시장 사람들
속도와 효율만이 미덕인 차가운 도시 강남.
화려한 마천루의 그림자 아래, 여전히 뚝배기 끓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는 곳이 있다. 영동전통시장이다.
50년 전, 주택가 담벼락에 기대어 서로의 고단한 끼니를 챙기던 ‘강남의 부엌’은
이제 퇴근길 직장인과 호기심 어린 청년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건배를 나누는 ‘소통의 광장’이 됐다.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배달되는 시대지만, 이곳엔 모니터 너머로는 느낄 수 없는 투박한 정과 따뜻한 눈맞춤이 남아 있다.
삭막한 도심 속,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것은 ‘낡은 좌판’이 아니라, 그 위에 켜켜이 쌓인 사람의 온기다.
강남 빌딩 숲 속의 섬… 사람 냄새 가득한 그곳
서울 강남구 논현동. 강남대로 마천루 바로 뒤편에는, 거짓말처럼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골목이 있다.
프랜차이즈 간판과 유리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반세기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강남의 섬’, 영동전통시장.
점심엔 사원증을 건 직장인들이 순대국밥집 앞에 줄을 서고, 그 옆에서 주민들은 떡을 고른다.
저녁이 되면 퇴근길 직장인들이 와인잔을 기울이고, 노포에선 고기가 구워진다.
20대부터 80대까지, 내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이는 이 혼종의 생태계는 영동전통시장만의 생존 방식이다.
반세기를 버틴 저력… 담벼락 노점이 ‘강남의 부엌’이 되기까지
영동전통시장은 계획된 상업지구가 아니라,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모여든 사람들의 필요가 만든 자연발생적 장터에서 출발했다.
주택가 담벼락을 따라 노점이 자리를 잡고, 천막과 점포가 붙으며 골목 자체가 시장으로 변했다.
이곳은 오랫동안 건설 현장 노동자와 새로 입주한 주민들의 ‘부엌’이자 생활의 기반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시장은 단순한 소비 공간을 넘어, 도시의 기억과 생계가 축적된 장소로 남았다.
쇠퇴의 실체… 매출은 늘었지만 시장은 늙어간다
최근 몇 년간 전통시장은 점포 수와 상인 수, 고객 수가 모두 감소하는 흐름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매출 지표는 상승하는데, 이는 물가 상승과 결제 단가 증가 같은 외부 요인이 만들어낸 ‘성장의 착시’일 수 있다.
또한 시장 내부에서도 먹거리 중심 업종이 강해지고 다른 업종은 빠져나가는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평균 매출이 실제 체감과 다른 방향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숫자상 성장과 구조적 쇠퇴가 동시에 나타나는 지점이 지금의 위기다.
위기 속의 혁신… ‘숨은 고수’를 깨워 시장을 학교로 만들다
영동전통시장은 가격 경쟁 대신 품질과 경험을 축으로 시장의 역할을 재구성하고 있다.
물건을 사러 ‘잠깐 들르는 곳’이 아니라, 배우고 먹고 만나는 이유로 ‘머무는 곳’이 되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체험형 프로그램, 공정성을 고려한 이벤트 운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상품 기준 같은 장치들은 시장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바꾸는 실험이다.
핵심은 “온라인에서 대체되지 않는 경험”을 시장 안에 만드는 것이다.
시장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도심형 전통시장의 넥스트
전통시장의 미래는 대형마트나 온라인을 따라잡는 데 있지 않다.
시장이 살아남으려면 거래 중심 공간에서 벗어나, 지역의 스토리와 다양성을 품고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게 만드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모든 시장을 동일한 방식으로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도심 속에서 생활의 감각과 관계의 온기를 붙들고 있는 시장이라면, 그 자체로 도시가 유지해야 할 ‘남겨야 할 미래’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