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BC와 AC로 나뉜 기업 근무제…“출근이요? 무슨 일 있나요?”

입력 2020-10-08 06:00

매출 100대 기업 88%가 재택근무 시행
조직 내 형평성 논란과 기업보안은 숙제

(그래픽=손미경 기자 sssmk@)

“웅녀(熊女)가 쑥이랑 마늘만 먹고 동굴에서 삼칠일(三七日) 살았잖아요. ‘자가격리’가 딱 그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격리 중에도 꼬박 재택근무는 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와 동선이 겹친 탓에 보건소 권유로 스스로 격리에 들어갔던 현대차그룹의 한 여직원은 집에서 보낸 시간을 ‘건국신화’에 빗댔다. 다행히 검사결과는 음성. 그녀는 “준비도 없이 재택근무를 시작했는데 별문제는 없었다”라고 했다.

격리 기간 중 업무지시는 유선으로 받았다. 부서 회의도 인트라넷을 통해 온라인으로 해결했다. 업무 결과 역시 출근 때와 다르지 않았다.

3월 11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우리 사회 모든 게 달라졌다. “세상이 비포 코로나(Before Corona·BC)와 애프터 코로나(After Corona·AC)로 나뉘었다”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온다.

산업계의 대표적 변화 가운데 하나가 근무제다.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감염병 확산 위험을 불러오는 만큼, 집체근무 대신 분산근무가 빠르게 퍼졌다.

가장 보편적인 게 팀을 두 개로 쪼개는 방식이다. 이후 각 팀이 교대로 출근하는 형태다. 출근 직원들 역시 출근과 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설정하는 탄력 근로제를 통해 흩어졌다.

시행 초기 “어떻게 감히 재택근무를…”이라며 반기를 들었던 이들의 주장도 점차 당위성을 잃었다. 코로나19 심각성이 확산하면서 유연근무제에 대해 필요성이 빠르게 퍼졌기 때문이다.

기업별로 재택 또는 순환 근무 돌입

1980년대 2차 ‘베이비붐 세대’(1970년대 생)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2부제 수업이 있었다.

교실이 모자라 홀수 반이 오전에, 짝수 반이 오후에 등교하는 형태였다. 그 시절 초등학생들이 이제 재계의 임원 또는 간부급 사원이 돼 다시금 낯선 근무제에 적응하고 있다.

기업별로는 당장 삼성전자가 9월부터 재택근무를 시범적으로 운영 중이다.

비단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일시적 근무제도 변화가 아니라 재택근무 자체에 대한 효율성 검증에 나섰다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전자는 보완점을 찾아 점검한 뒤 추가운영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효과가 뚜렷하다면 코로나19 이후 시대에도 이를 도입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LG그룹 역시 임산부 등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시행 중이다.

LG화학과 LG디스플레이는 순환 재택근무를 도입했다. SK그룹의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SK E&S 등도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별로 재택을 포함한 유연근무제를 확대 운영하고 있다.

(그래픽=손미경 기자 sssmk@)

100대 기업의 88%가 재택근무 시험中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부터 발 빠르게 대응해 주목을 받았던 현대차그룹도 본격적인 재확산(8월 중순)을 앞두고 일찌감치 유연근무제를 재도입했다.

다른 기업과 다른 점은 팀별로 유연근로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룹 콘트롤타워가 지침을 내리기 전, 조직별로 필요하다면 즉각 근로제를 전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상황이 하루하루 변하는데 일정한 기준으로 전체 그룹사를 제어할 수 없다”며 “계열사별로, 본부나 팀이 업무 특성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 중이다. 수도권 확진자가 증가하기 시작한 8월 중순부터 이미 선별적 재택근무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재계 전반에 걸쳐 이런 양상이 뚜렷하게 확산 중이다.

경총이 조사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른 매출 100대 기업 재택근무 현황’에도 이런 양상이 뚜렷하다. 지난달 14일 응답 기업의 88.4%가 사무직 재택근무 시행 중이다. 생산직은 재택근무를 시행하지 않지만, 방역 조치 강화와 근로자 분산 등을 추진 중이다.

재택근무 효과도 이전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업무 생산성이 정상근무 대비 90% 이상이라는 평가도 전체 응답 기업 가운데 절반(46.8%)에 달했다. 10.6% 기업만이 효율성이 70% 미만이라고 답했다.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때에 따라 재택근무를 활용할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53.2%에 달했다.

이처럼 유연근로제가 확산했지만, 이 과정에서 근로자 간의 형평성, 기업 보안도 숙제로 남았다. 나아가 효율성과 관련해서도 의견도 엇갈린다.

재택근무 자체는 불가피하지만, 사내에 충분한 설득력이 필요합니다.
집체근무와 동일한 효율성을 얻는다고 해도, 조직 내 불만이나 불균형이 지속하면 기업에는 또 다른 리스크가 되거든요.

직군별 형평성 논란과 기업 보안은 숙제

그룹 본사에 근무하다 임원 승진과 함께 계열사로 자리를 옮긴 A 씨도 ‘유연 근무’라는 제도가 아직 어색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유연근로제 대부분이 한시적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언제든 이전의 ‘집체근로제’로 전환할 수 있다”라며 “한시적 제도이기 때문에 지금은 효율성 차이가 없지만, 장기화하면 성과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임원 B 씨 역시 “재택근무 자체는 불가피하지만, 사내에 충분한 설득력이 필요하다”라는 견해를 내놨다.

그는 “유연근로제가 집체근무와 같은 효율성을 얻는다고 해도 조직 내 불만이나 불균형이 지속하면 기업에는 또 하나의 리스크가 된다”라고 우려했다.

생산직을 포함 ‘재택근무’ 자체가 불가능한 직원들과의 공감대는 여전히 절실하다는 의미다.

자동차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직원 C는 “생산기술본부는 엔지니어 출신도 조립공정에 직접 관여하다 보니 사실상 재택근무가 불가능하다”라며 “근무형태가 자유로워지면서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직군에서는 오히려 기피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보완책이나 별도의 지원책도 수반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업 보안도 풀어야 할 숙제다. 기업마다 철옹성 같은 보안 체제를 유지 중이지만 재택 및 유연 근로 탓에 보안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는 우려도 속속 나오고 있다.